에어차이나? 처음 들어봤지만 괜찮아 보인다
2019년 1월, 매년 반복되지만 행복한 고민의 시간이 찾아왔다. 바로 올해는 어디로 갈까. 작년에는 시댁 식구들과 말레이시아에 다녀오기도 했고, 업무 상 일본, 대만, 태국 출장이 잦아 아시아 지역은 내키지 않았다. 미국은 학생 시절 유명한 지역은 거의 가봤고, 남미는 너무 멀고... 하나 둘 솎아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럽으로 좁혀졌다.
그 날도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습관적으로 멍하게 스카이스캐너 앱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파리행 항공권이 60만 원대로 나와 있는 것이다! 바로 결제 버튼을 누르려다 혹시나 하여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걸리는 점이 있었다. 중국에서 한 번 경유하는 일정이고, 항공사도 처음 타보는 에어차이나였다. 급하게 "에어차이나 후기"를 검색해 보았는데 "기내식 빼고는 생각보다 괜찮다" (이 글을 보고 나는 특별식으로 주문했더랬지), "우리나라의 대한항공, 아시아나 같이 에어차이나가 중국에서는 국적기라 안심해도 된다" 등의 좋은 글이 많았다. 경유 시간도 2시간 30분 정도로 길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이 이 모든 조건을 상쇄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1월 말에 6월 출발 일정으로 결제했다.
드디어 파리에 가나 했더니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품은 채 어느덧 상반기가 지나갔다. 그동안 우리의 대략적인 일정도 짜두고, 에어비앤비도 예약하고, 신혼여행때도 하지 않았던 스냅사진도 예약하고, 여행자 보험에도 가입해 두었다. 출발 당일,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같이 일어나 공항으로 향해 무사히 비행기에 탑승했다. 베이징에서 한 번 경유하여 파리 샤를 드 골 국제공항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다. 비행기도 지연 없이 제 시각에 출발했다. 여기까진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오전 11시. 베이징에 도착할 시간인데 승무원들이 왠지 분주해 보인다.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방송이 이어진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해..." 하늘이 이렇게 맑은데? 느낌이 싸했다. 승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또다시 안내 방송이 나온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베이징 공항에 착륙하지 못해 OO 공항에 잠시 착륙해 대기합니다." 웅성거리던 객실은 이내 시장통마냥 시끌벅적해졌고 승객들이 앞다투어 승무원들을 불러 불만을 토로한다. 승무원은 현재 날씨 때문에 베이징 공항에 착륙하지 못해 다른 공항에서 기다려야 한다며, 현재로서는 베이징 공항으로부터 착륙 허가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객실 내 대부분의 승객들이 베이징을 경유해 환승을 하는 일정이라며, 혹시 다음 비행기를 놓치더라도 그다음에 있는 가장 빠른 비행기를 연결해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우리도 승무원을 불러 파리행 다음 비행기가 언제 있는지 물었다. 승무원이 본인의 스마트폰에서 비행 일정을 보여준다. 새벽 2시?! 다음 비행기를 놓치게 되면 무려 12시간이 넘게 공항에 체류해야 하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우리가 당황하는 사이 비행기는 이미 방향을 틀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봐도 베이징 공항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한적한 시골의 어느 공항에 착륙하였다. 데이터는 이미 끊긴 상태이고, 활주로 한가운데 와이파이가 있을리 만무. GPS를 켜 구글맵에 들어갔는데 우리의 위치가 몽골 어딘가에 있다고 나온다. 우리의 다음 비행기는 13시 35분. “혹시나 그전에 베이징 공항에 도착하면 미친 듯이 뛰어서 탈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남편에게 말했다.
헛된 기대는 품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비행기는 오후 3시가 다 되어서야 베이징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 사이 파리행 비행기는 야속하게도 우리를 두고 떠났다.
생각지도 못한 베이징 공항에서의 12시간
오후 3시가 훌쩍 넘어 드디어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 기장의 안내대로 날씨가 문제였다면 도착하는 비행기 뿐만이 아니라 출발하는 비행기도 연착되었어야 할 텐데 파리행 비행기는 예정된 시각에 잘 떠났다고 한다 (아직도 그 날 착륙 지연의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다). 공항 내 안내 창구는 이내 다음 비행기 티켓으로 변경하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창구에 있는 중국인 직원들은 로봇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고, 심지어 중간에 일부 직원들은 근무 시간이 끝났는지 자리를 비워 한 줄이 전체가 다시 줄을 서야 하는 상황도 발생했는데, 이런 그들의 무책임한 대응 방식은 이미 화가 날대로 나있었던 승객들의 분통을 자아냈다. 우리도 앞에 끝없이 늘어져 있는 줄을 보며, '새벽 비행기라도 탈 수 있는 것인지', '혹시 만석이라 그 다음다음 비행기를 타야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이미 하루치 숙박비는 날렸는데' 등등 별의별 생각을 하며 불안에 떨었다. 한 시간을 넘게 줄을 서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고, 다행히도(?) 다음 파리행 비행기인 새벽 2시 5분 좌석이 아직 남아 있어 변경된 티켓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줄을 기다리는 동안에 얼핏 듣기로는, 요청 시 공항 근처에 있는 호텔 숙박권을 준다고 했다. 하지만 우선 우리가 그 대상에 해당하는지 확실치 않았고, 만약 우리가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해도 공항에서 호텔까지 왕복 시간을 감안하면 호텔은 정말 찍고만 와야 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무엇보다 중국어도 못하는 우리가 또 어떤 변수로 인해 공항에 제 시각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아침부터 너무나 많은 변수들에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공항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나중에 라운지에 있는 외국인들의 대화를 통해 들은 내용이지만, 일부는 항공사에서 마련해준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려고 공항 밖으로 나갔는데 중국 비자가 없어 다시 공항으로 되돌아와야 했던 모양이다. 공항에 머물기로 한 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신규 티켓으로 발급 받고, 탑승할 게이트도 확인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으려면 공항 내 식당을 이용해야 했는데 그럴 바에는 라운지에서 가서 식사도 하고, 샤워도 하고, 편하게 쉬다가 탑승 시간에 맞춰 나오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잦은 출장으로 예전에 만들어 두었던 라운지 카드가 있어 남편 것만 결제하면 되었다. 바로 근처에 있는 라운지에 들어갔는데 직원이 2시간만 이용 가능하다고 한다. 원래 라운지에 이용 시간제한이 있었던가? 물어보니 베이징 공항 내 모든 라운지가 이용 시간이 2시간이라고 한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2시간짜리 라운지 1인 이용권을 결제했다. RMB 260, 무려 5만 원에 육박하는 금액이다. 라운지가 이렇게 비싼 줄 몰랐다 (다행히 나중에 이 비용은 여행자 보험을 통해 환급받았다).
라운지는 지금껏 가본 곳 중에서 가장 별로였는데, 쿰쿰한 카펫과 소파는 앉아 있는 것도 찝찝했고, 음식도 매우 부실했다. 정체 모를 반찬 몇 가지에 컵라면 두 종류, 빵도 모닝빵 밖에 없었다. 과일이나 샐러드도 따로 없고, 오로지 방울토마토만 있어서 잔뜩 담아왔다. 하지만 우리가 그 날 먹은 거라곤 내용물이 부실한 기내식과 줄 기다릴 때 공항 직원이 보급 식량마냥 나눠준 비스켓이 전부. 불평할 때가 아니었다. 두세 번에 걸쳐 야무지게 집어와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그래도 공항 라운지라는 곳을 난생처음 와본 남편은 "라운지가 좋긴 좋네"라며 행복해했다.
라운지에서 든든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각자 돌아가며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나오니 이용 시간 2시간이 거의 다 지나가 있었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라운지를 떠나 게이트로 향했다. 게이트 근처에 자리를 잡고, 그때부터는 무한한 기다림의 연속. 사실 이렇게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이때 남겨진 사진을 들춰 보니 수다를 떨고, 셀카를 찍고, 책도 읽었다, 졸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때웠던 것 같다.
기다림의 시간은 지질하게도 느렸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지나가긴 하더라. 어느덧 탑승 시간이 되어 무사히 탑승해 비행기에서 잤다 깼다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어느새 파리에 도착해 있었다. 계획대로라면 전 날 저녁 6시 40분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다음날 아침 7시에 도착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택시를 잡고 숙소에 도착하니 9시가 넘었다. 시차를 적응할 새도 없이 파리에서 첫날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 여행자 보험 신청 방법
유럽에 소매치기가 많다고 하여 혹시나 모를 돌발상황에 대비해 여행자 보험에 가입해 두었는데, 항공기 지연으로 보상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가입한 현대해상 여행자 보험은, 항공기 및 수하물 지연비용에 대해 20만 원 한도 내에서 실비로 보상받을 수 있었다. 에어차이나 고객센터에 전화해 항공기 지연 증명서를 받아 식사, 간식비 영수증과 함께 첨부하면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다. 우리는 2인 라운지 이용비와 스타벅스 커피값을 청구해 총 9만 원 정도를 보상받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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