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라면 첫날 저녁에 파리에 도착해 푹 자고 하루를 시작했었어야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환승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우리는 따뜻한 숙소 대신 차가운 공항과 비행기에서 쪽잠을 잤고, 갓 구운 바케트와 잼 대신 밍밍한 기내식 (그래도 비행기를 예매할 때 미리 저염식과 과일식으로 신청해놔서 그나마 괜찮았다) 을 먹고 둘째 날 오전이 되어서야 비로소 파리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전 포스팅 참고). 피곤했지만 이미 하루가 날아갔는데, 또 하루를 통째로 날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그 날은 스냅사진도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스냅사진도 나중에 이슈가 있었다) 그 와중에 꾸역꾸역 화장도 하고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사실 파리에서 우리가 묵었던 숙소는 생각보다 더 좁고 칙칙해 별로였는데,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점은 매일 오며 가며 에펠탑을 일상의 한 풍경처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손미나 작가님의 '파리에선 그대가 꽃이다'라는 책에서 보면 작가님도 에펠탑 근처로 집을 구해 사셨다는데, 우리나라로 따지면 외국인이 경복궁 근처에 자리를 잡고 사는 것과 같이 현지인의 눈에는 특이해 보일 수 있다고. 그래도 파리지엥처럼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가서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 이곳에 머무는 짧은 기간 동안이라도 실컷 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파리는 루브르나 오르세 같은 유명한 관광지가 거의 모여 있고, 에펠탑만 중심지에서 살짝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하루에 지하철 왕복 한 번씩만 이용하고 나머지는 거의 도보로 이동했다. 같은 승강장이라도 시간에 따라 도착지가 달랐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첫 날이라 지하철을 잘못 타서 반대 방향으로 갔더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내려서 중심가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도착하니 벌써 점심시간.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을 구글 지도로 검색해 평이 괜찮은 곳을 찾아 들어갔는데,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에서 먹었던 식사를 통틀어 가장 맛있었다. 고생 끝에 먹은 제대로 된 첫 끼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행 초반부터 생각지도 못하게 몸 고생, 마음 고생했으니 맛있는 요리로 보상받고 싶은 심리도 있었고, 또 가격도 생각보다 비싸지 않아 런치 코스를 주문했는데 대만족이었다. 식사 한 끼로 그간의 스트레스가 스르르 녹는 기분.
하지만 평탄한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밥을 먹고 주변을 살살 거닐다가 스냅 촬영을 약속한 시간이 되어서 만나기로 한 루브르 리볼리 역에 도착해 작가님께 메세지를 남겼다. 그런데 작가님으로부터 급하게 전화가 와서 촬영이 오늘이 아니지 않냐는 것이다. 어찌 된고 하니 전날 환승 비행기를 놓쳐 공항에 있을 때 혹시 촬영 날을 변경 가능한지에 대해 문의했었는데, 날짜 조율이 여의치 않아 결국 무리하더라도 변경 없이 진행하기로 했는데 (적어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작가님은 일정이 변경된 것으로 잘못 이해하신 것이다. 촬영을 위해 화장도 하고 얇은 옷을 입어 하루 종일 덜덜 떨며 돌아다녔는데... 허무해 웃음이 나왔다.
그리하여 대안으로 가게된 곳이 바로 오르세 미술관. 원래는 그 날 아침에 가려고 했는데 아침도 날아가는 바람에 다음날 일정으로 어떻게든 밀어 넣어볼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다행히 가방에 미리 준비해둔 티켓도 있었다. 루브르 리볼리 역에서 얼마 걷지 않아 오르세 미술관에 도착했다.
사실 이때부터 남편과 나는 시차 부적응으로 반수면 상태였기 때문에 안에서 뭘 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 작품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오디오에서 나오는 설명이 나의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반대편 귀로 흘러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길 다시 언제 와보겠냐며 정신력으로 버텨 한 군데도 빠짐없이 다 둘러보았고, 특히 제일 위층에 있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꽤 깊게 각인되어 있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이나 보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거의 폐관 시간까지 머물다 나왔다. 6시쯤 되었는데도 어둑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며칠 지내고 나서야 6월의 파리는 해가 굉장히 늦게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미 체력을 탕진할 대로 탕진한 우리는 집 근처 한인 마트에서 간단히 장을 보고, 한국에서도 잘 안 먹는 라면을 끓여먹고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부치기로 했다. 그때가 저녁 7시쯤이었는데, 우리는 9~10시쯤 일어나 에펠탑 야경을 보러 나가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눈을 뜨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어쩐지 너무 개운하더라...). 저녁을 먹은 직후라 환기를 시킬 겸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잠이 들었는데 아침까지 닫지 못했고, 결국 남편은 이때 감기에 걸려 여행 기간 내내 골골거려야 했다.
Hebe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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