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지만 또 그만큼 오랜 기간 모른 척했던 이슈가 있다. 바로 동물 복지, 그리고 비건. 대학생 때부터 환경 관련 공모전을 비롯해 기후변화 홍보대사로 활동을 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첫 사회생활을 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 분야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익숙한 주제지만, 또 그 장벽이 너무 높아 실천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주제이기도 하다. 굳이 예전부터 실천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면 가능한 햄이나 소시지 같은 가공육을 피하는 것. 이 결정도 대단한 사회적 신념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건강에 대한 관심과 우려에서 시작한 것이고, 이마저도 미국 유학 시절에는 잠시 내려놓고 지냈다. 베이컨이나 소시지가 들어가지 않은 메뉴를 찾기가 어렵다는 어쭙잖은 자기 합리화를 하며.
그러다 얼마 전부터 조금씩 채식의 삶을 실천해보고 있는 중이다. 하루아침에 마음먹은 것은 아니고 어떤 계기에 의해, 또 그 계기들이 모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어느 날 요조 님이 쓰신 '아무튼 떡볶이'를 읽다가 책에서 추천한 김한민 님의 '아무튼 비건'을 이어서 읽게 되면서, 그리고 또 그 책에서 추천한 넷플릭스의 'What the health (몸을 죽이는 자본의 밥상)'을 보게 되면서였다. 우연히 몇 주에 걸쳐 관련 책과 다큐멘터리를 접하고 난 뒤에는 더 이상 고기가 예전만큼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비릿하게 느껴졌다.
또 다른 계기는 아기의 이유식을 준비하면서부터이다. 이유식 책을 몇 권 읽다 보니 책마다 공통적으로 육류나 계란은 무항생제로 고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말인즉슨, 아무 고민 없이 마트에서 집어 든, 혹은 온라인으로 주문한 육류들이 기본적으로는 항생제를 잔뜩 투여한 건강하지 않은 고기라는 것이다. 발 디딜 곳 없이 비좁은 우리 안에서, 생명이 시작되자마자 죽음 선고를 받은, 아무런 삶의 의미도 갖지 못한 채 인간들의 먹이가 되기 위해 태어난 가축들의 모습 - 아마도 몇 년 전 우연히 봤는데 차마 끝까지 다 보지 못했던 영상의 잔상이었을 것이다 - 이 오버랩되었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연쇄 작용처럼 일어난 크고 작은 자극들 덕분에 요즘 일상 속에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범위에서 채식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아무튼 비건' 책을 통해 이렇게 간헐적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을 일컬어 플렉시테리언*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은 기본적으로 비건 채식을 지향하지만, 상황에 따라 육식도 하는 채식주의자를 지칭). 쟁여두고 먹을 만큼 애정했던 멸균 우유는 아몬드 브리즈로 대체되었고, 마침 아기 이유식을 시작하게 되면서, 남는 식재료들로 여러 가지 건강한 레시피를 실험해보고 있다. 아기는 생후 6개월부터 고기 섭취를 통해 철분을 보충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집 식탁에서 완전히 고기가 빠지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어렵겠지만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하나하나씩 시도해 나가보려고 한다.
아래 사진은 최근에 요리해 먹었던 우리 집의 meat-free 식단. 요리에 계란이나 참치도 사용했기 때문에 완벽한 비건식은 아니지만, 고기 없이도 충분히 맛있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버섯 토마토 토스트
식빵 위에 스파게티 소스를 얇게 바르고 그 위에 새송이 버섯, 토마토, 피자 치즈, 파슬리를 올리고 오븐에 10분 정도 구워주면 끝.
잘 구워진 새송이 버섯은 쫄깃쫄깃해서 고기와 같은 식감이 난다.
강된장 열무 비빔밥
참치 강된장을 잔뜩 만들어 둔 김에, 친정에서 받아온 열무김치를 넣어 비빔밥으로 만들어 먹었다. 보통 상추같은 야채도 같이 넣는데 없어서 냉장고에 있던 오이 고추를 넣어 먹었는데 열무와는 또 다른 아삭한 식감과 향 때문에 더 맛있었다. 다른 반찬 없이도 한 그릇 뚝딱 할 수 있는 진정한 밥도둑.
콩국수
아기 이유식 사러 마트 친환경 코너에 갔다가 산 친환경 콩물. 소면을 삶아서 콩물을 붓고 얇게 썬 오이를 얹은 후 검은깨를 솔솔 뿌려주면 끝이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없다.
아보카도 치아바타 샌드위치
동네 빵집에서 치아바타 두 개를 사 왔다. 잘 익은 아보카도와 각종 야채, 버섯, 계란 등을 자유롭게 넣고 홀그레인 머스터드, 마요네즈를 뿌리면 끝. 정말 맛있다 (완성된 사진을 찍기도 전에 다 먹어버린 건 비밀).
+. 이대로 끝내기 왠지 아쉬워서 채식 관련 Ted Talk 한 편 공유. 몇 년도 더 된 영상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렬한 깨달음(?)이 있었던 스피치였다. 예컨대 나도 "Monday vegetarian"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에세이 > 일상이 특별해지는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기록. (0) | 2022.04.25 |
---|---|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내린 최선의 선택들의 교집합 (0) | 2021.11.17 |
3월 말, 봄이 완연한 올림픽 공원의 스케치 (Feat. 사회적 거리두기) (0) | 2020.03.29 |
(아마도) 출산 전 마지막 서울 근교 나들이 (이천 산수유 마을/ 이코복스 커피/ 시몬스 테라스) (0) | 2020.03.23 |
7년 만에 갈아탄 아이패드 미니 5 사용 후기 (장단점) (0) | 2020.03.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