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이 다가올수록 아기를 만난다는 설렘(그리고 약간의 공포)과 동시에 남편과 단둘이 보내는 이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3년이라는 꽤 긴 신혼 생활을 가진 뒤 가진 아기라 (그러고 보니 며칠 뒤가 결혼 4주년이네) 둘이서 지내는 생활에 더 이상 큰 미련 두지 않고 자연스레 셋이 되는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이었다. 결혼 후 매년 꼬박꼬박 다녀왔던 해외여행은커녕 당분간 집 앞 마실도 나가기 어려워질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 과연 여름이와 함께할 앞으로의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나마 남편이 요즘 재택근무 중이라 출산 전 마지막을 24시간 힘께 보내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삼시 세 끼를 고민해야 하는 주부의 고민은 시작되었지만.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주말에 가까운데 마실이라도 다녀오자고 했다. 이제 한동안은 못 누릴 호사(?)이니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지난번에 다녀온 양평이 집에서 그나마 가까워 다녀오기 좋은데, 요즘 양평이 코로나 청정지역으로 소문이 나서 (아직 확진자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주말마다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춘천, 남양주 등 여러 지역을 생각했으나 결론적으로 우리가 선택한 곳은 이천. 집에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이고, 봄이 되어 산수유 마을에 꽃이 예쁘게 피었다는 어느 블로그의 후기를 보았다. 산수유 마을에서 매년 개최하는 축제는 취소되었지만 오히려 이 덕분에 사람이 덜 복작복작할 것 같아 사부작 다녀오기로 했다.
며칠 전 병원에 갈 때만 해도 코트를 껴입었는데 어느새 완연한 봄이었다.
이천 산수유 마을
네비에서는 50분이면 도착한다고 했는데 우리처럼 답답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온 이들이 많았는지 차가 꽤 막혀 산수유 마을까지 1시간 10분이 걸렸다. 그래도 차 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숙면을 취하고 나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축제가 취소되었는데도 줄줄이 이어지는 차량 행렬로 주차장 안에서도 한참을 돌고 나서야 겨우 차를 댈 수 있었다. 노란 산수유 꽃이 입구부터 마을 곳곳에 예쁘게 피어있었다. 오르막길이었지만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나 같은 만삭 임산부도 큰 부담 없이 걸어갈 수 있었다. 물론 올라가면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코복스 커피
이천에 왔으니 이천 쌀밥으로 점심을 먹고 (나름 전통 깊은 한정식집에 갔는데 분위기가 너무 정신없고 음식도 짜서 별도 포스팅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천 시몬스 테라스로 향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침대 브랜드 시몬스에서 운영하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1층에는 이코복스 커피라는 카페가 입점해 있는데 찾아보니 스페셜티 커피로 이미 입소문이 난 곳이었다. 커피 원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남편은 Jazz로 시키고 나는 분자가토라는 메뉴를 선택했다. 추가로 레드벨벳 케이크도 주문했다.
주문을 하고 옆을 보니 사람들이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 분주하게 있길래 설마 셀프로 내려 마시는 건가?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커피를 내리는 머신이 개방형으로 진열되어있고, 그 앞에서 직원들이 커피를 내려주고 있었다. 테이블과 테이블 사이 간격이 넓어 여유로웠지만 바이러스가 무섭기도 하고, 밖의 날씨가 너무 좋아서 (나중에 미세먼지는 꽤 나빴음을 알았지만) 우리는 건물 앞 야외 테이블에서 커피를 즐겼다.
커피 아로마가 딱 본인 스타일이라는 남편. 이미 매주 원두를 정기 배송 받고 있기 때문에, 추가로 구매하기를 주저하길래 남편이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몰래 원두를 구매해 버렸다. 왜 샀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실실 웃음을 쪼개던 바보 같은 남편 :) 로스팅 일자도 3일 전이라 좋았다.
시몬스 테라스
간단히 당 충전을 하고 드디어 시몬스 테라스를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카페와 바로 연결되어 있는 1층에는 시몬스에서 출시한 다양한 종류의 매트리스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도 여느 다른 커플들처럼 하나씩 앉아 보았다. 그중 우리 둘 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Musk 라는 제품명의 매트리스. 우리 집 침대는 왜 이런 느낌이 안나는 거지? 라며 괜히 신혼 때부터 잘 쓰고 있는 침대 탓을 해보며 다음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가면 옛날에 침대를 만들었던 베틀과, 시몬스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를 볼 수 있다. 넓은 공간에 비해 전시물이 많지는 않아 쓰윽 훑어보고 내려오면 된다. 전시 내용보다 호젓한 건물 인테리어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더 기억에 남는 곳이다.
다시 1층으로 내려오면 바로 맞은편 건물에 힙합을 주제로 소규모 전시회가 진행 중이었다. 아주 아담한 공간이라 이곳도 한번 스윽 둘러보고 나오기 좋다. 힙합에 대해 좀 더 잘 알았다면 감흥이 있었으려나?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다녀온 주말 이천 나들이. 확실히 한동안 집에만 박혀 있다가 바깥 공기를 쐬고 오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얼어 있는데 밖에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봄이 성큼 와있었다.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지만, 이렇게 무탈히 보낼 수 있는 하루하루,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계절의 변화를, 그리고 또 곧 찾아올 나의 여름이를 온몸으로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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