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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일상이 특별해지는 기록

만년필 세계 입문기 (feat. 라미 사파리, 트위스비 에코, 펠리칸 M200)

by Heather :) 2023. 10. 11.

   만년필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작년 즈음이다. 전에 다니던 회사가 만년필 제조사로 유명한 라미와 콜라보한 제품이 처음 출시되었을 때 저렴하게 구입해 두었는데, 몇 년간 방치해 두었다가 작년에 갑자기 꺼내보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새 제품이었음에도 잉크가 나오지 않아 불량인가 하고 당황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 제품 (제품명은 '라미 사파리'로 입문용 만년필로 가장 유명하다) 은 장기간 쓰지 않으면 잉크가 잘 마른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렇게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만년필을 분해해 잉크를 녹이고, 또 녹인 잉크가 아까워 검색하다가 아예 컨버터와 병잉크를 추가로 구입했다. 우여곡절 끝에 첫 만년필을 살렸는데 생각보다 만년필을 쓰는 느낌이 좋아서 또 폭풍 검색, 라미 사파리와 함께 입문용 만년필로 유명한 트위스비 에코를 하나 더 들였다. 그런데 잔뜩 기대하며 처음 시필을 했는데 내가 기대했던 느낌이 아니었다. 같은 EF촉 (가장 얇은 촉) 인데도 사파리보다 더 얇고 (내가 어느정도 굵기가 있는 펜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 때 처음 알았다.) 종이를 긁는 듯한 불편한 느낌에 크게 실망을 했다. (그 뒤로 일부러 정을 붙이려고 자주 썼더니 지금은 부드럽게 잘 나온다.) 그렇게 만년필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시들해졌고 나의 만년필 여정도 여기서 마무리가 되는 듯했다.
 
   그러다 10월로 진입하며 날씨가 부쩍 쌀쌀해진 탓인지 헛헛한 기분이 들어 (그렇다. 변명임을 알고 있다.) 오랜만에 유튜브 잉크잉크 Ink inc. 님의 채널 영상을 둘러보다가 그날 바로 펠리칸 M200을 당근으로 충동구매 해버렸다. 내 안에서 꽤 오랫동안 off 상태였던 스위치가 하나 켜진 느낌이었다. 마침 이번달 긴 연휴가 포진해 있었던 덕분에 덕질(?)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아이를 재우고 늦은 밤 혼자 블로그와, 네이버 카페, 유튜브 등 여러 채널을 전전하며 다양한 만년필 컨텐츠를 단기간에 섭렵할 수 있었다. 아마 이번 연휴 기간 동안 검색에만 족히 10시간은 썼을 것이다.

잉크잉크 Ink inc.

www.youtube.com

 
   얕게나마 만년필의 세계를 접하고 나니 커뮤니티에서 만년필 애호가들이 쓰는 용어들도 참 흥미로웠다. 가령 만년필을 구입하는 것을 '득펜'이라고 한다거나, 필기량이 방대할 때 사용하는 만년필을 '전투용 펜'이라고 한다거나, 또 펠리칸 만년필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을 '조류독감에 걸렸다'라고 표현하는 것 등이다. 만년필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머글'이라고 부르는 것도 재미있었다. 해리포터에 빠져 해리포터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입해 활동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참고로 나는 여전히 해리포터를 좋아한다. 책은 물론이거니와 작년에 나온 해리포터 20주년 기념 영상을 포함한 모든 영화 시리즈를 소장하고 있다.) 아무튼 이런 종류의 덕질은 정말 무해하고 귀엽다.
 
그리하여 짧지만 밀도 높은 디깅 끝에 이루어진 나의 최근 소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펠리칸 M200 (EF촉)
  • 제이허빈 잉크 30ml 3종류 (풀밭, 버마의 호박, 물망초)
  • 어프로치 노트 프로 (3만원 이상 무배라서 4권이나 사버렸네)
  • 호보니치 테쵸 다이어리 A5 커즌 (곧 구매할 예정)

 
   만년필을 추가로 들이니 새 잉크도 사야 하고, 만년필을 잘 ‘받아주는’ (이것도 커뮤니티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다.) 종이도 필요하고, 또 곧 2024년이니 만년필을 쓸 수 있는 다이어리도 하나 사야겠고, 그러다 보니 구매 아이템이 확 늘었다. 그 사이에 도착한 펠리칸 M200은 다행히 잘 맞았다. 그리고 M200이 내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나는 다른 만년필을 또 알아보고 있었는데… 바로 파이롯트 커스텀 742다. 이제 스틸닙이 아닌 금닙의 만년필도 하나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기 때문인데, 만년필 커뮤니티에 따르면 나는 지금 전형적인 만년필 입문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 같다. 왠지 이것도 올해가 가기 전에 사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한 유튜브 영상에서 본 어떤 분의 댓글이 기억에 남는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만년필 소비를 통해 당신 내면의 부족 상태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 라는 뉘앙스의 글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의 최근 이 뜬금없어 보이는 소비도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사유하고 싶다는 내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2년 넘게 함께 하고 있는 북클럽 안에서 책 필사 모임이 생겨 참여하게 되었는데 부디 이번에 새로 들인 만년필과 각종 필기도구들이 쓰임새를 잘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든든한 필기 도구들 (왼쪽부터 미도리 노트, 트위스비 에코, 라미 사파리, 펠리칸 M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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