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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독서는 취향껏

<노인과 바다>, 그리고 소설의 힘

by Heather :) 2023. 10. 23.

   책을 좋아하고 평소에도 즐겨 읽는 편이지만 나의 독서 취향은 굉장히 편향적이다. 경제경영이나 에세이 류는 즐겨 읽지만 소설책은 일 년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적게 읽는 편이다. (방금 이 문장을 적고 궁금해서 밀리의 서재 통계 기능을 통해 확인해 보니 예상대로 경제경영 - 에세이 - 자기계발 순으로 읽고 있었다.) 소설은 막상 읽기 시작하면 금세 몰입해 그 어떤 책 보다 빠르게 완독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을 고를 땐 소설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어차피 시중에 평생 읽어도 모자랄 정도로 방대한 양의 책이 읽는데, 이왕 읽는다면 픽션보다는 논픽션을 고르는 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인 것 같다.

밀리의 서재 통계


 
   소설에 대한 나의 이 편견은 한 달 전쯤 우연히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오디오북으로 접하면서 완전히 깨져버렸다. <노인과 바다>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지만 부끄럽게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줄거리는 대충 알고 있어서 (현대 교육 과정을 거친 지구인이라면 이 책의 스포일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굳이 읽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배우 이보영 님이 녹음한 버전을 발견하고 (단순히 팬심에) 부담 없이 구매해 들어보게 된 것이다.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

audioclip.naver.com

 
   보통 나는 오디오북을 활자를 읽을 힘이 없을 정도로 지친 날,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 듣는 편이다. 이야기가 빌드업이 되는 초반 1~2장은 듣다가 계속 잠이 드는 바람에 며칠에 걸쳐 다시 듣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러다 노인이 망망대해에서 홀로 고독한 싸움을 시작할 무렵부터 점점 작가가 창조한 이 서사에 빠져들기 시작하더니 결국 그날 홀린 듯이 다 들어버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였다. 오디오북이 꺼진 후에도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며 흥분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내일 출근이야. 정신 차려'를 속으로 백 번 정도 외치고 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날의 느낌은 도저히 내가 아는 언어와 표현력으로는 충분히 묘사할 수 없을 만큼 생경하면서 동시에 황홀한 어떤 것이었고,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내 안에 잔상처럼 남아있다. 

   이런 이질적인 경험을 하고 나니 소설이라는 장르가 더 이상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소설과 같을 수 없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에서도 우리 인류는 가십의 종족이라고 정의했던 것처럼, 이야기는 단순히 픽션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보다 우리네 삶이 덜 드라마틱하다는 점에 안도하기도 하고,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본질이 비슷한 경험으로부터 감정 이입을 하고, 내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지를 자유롭게 상상해 보기도 한다. 결국 픽션도 논픽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생에 필요한 질문을 던져주기도 하고, 삶의 지침이 되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며칠 전 김영하 작가님의 강연을 온라인으로 들을 기회가 있었다. '창의성을 다시 생각하다'가 강연의 주제였는데, 두 시간 남짓한 작가님의 강연 중 유독 기억에 남는 두 문장이 있었다.

김영하 작가님의 강연

 

자기계발서와 경영경제서를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발전시킬 것 같지만, 
인류는 사실 이야기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후예죠.
소설은 일어날지 모르는 이벤트들을 미리 심리적으로 경험해 보는 행위입니다.

                   
   그러고보니 김영하 작가님의 책도 나는 에세이인 <여행의 이유> 밖에 읽어보지 못했네. <검은 꽃>, <살인자의 기억법> 등 작가님의 유명한 소설이 참 많은데. 이제부터는 소설에 조금 더 관대해져도 될 것 같다. 이야기는 확실히 삶을 풍성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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