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긴장을 풀고, 뤼크가 말한 대로, 내 인생에 도착한 이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내가 피아노를 구한 것이 아니라, 피아노가 나를 찾아온 느낌이었다.
#1
초등학생 시절, 신학기가 되면 담임 선생님이 개인의 인적 사항을 적는 종이를 나눠 주셨다. 한글명, 한문명, 주소, 부모님 성함 외에도 취미, 그리고 특기를 적는 란이 항상 빠지지 않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피아노'를 이 둘 중 한 곳에 적어 제출하곤 했다. 학교에서는 책상을 건반 삼아 쉬는 시간에 자주 피아노 치는 시늉을 했는데 담임 선생님께는 이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학기 말에 나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격려하는 편지를 써주신 적이 있다.
#2
5살 때부터 피아노 학원을 다니기 시작해 초등학교 6년 내내 피아노를 배웠다. 부모님은 빠듯한 형편에도 일찍이 나를 위해 업라이드 피아노를 한 대 사주셨다. 내가 피아노 판매점에 가서 직접 고른 피아노가 처음 우리 집에 도착한 날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피아노를 받고 나서도 많이 치면 닳을까 봐 조금씩 아껴서 쳤다. 나중에 엄마로부터 피아노는 닳지 않는다고, 치면 칠수록 소리가 더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안심하고 마음껏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기억이 있다. 지금도 친정에 가면 그 피아노가 그대로 있다. 내가 쳤던 그 방, 그 자리에. 내가 떠난 뒤 오랫동안 방치되어 조율이 심각하게 필요한 상태지만 건반은 계속 나무 덮개로부터 보호되어 있던 터라 가끔씩 친정에 가면 일부러 쳐보곤 한다.
#3
어렸을 때 <개구리 소년>이라는 TV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여러 에피소드 중 개구리 왕눈이 피리가 리코더를 부는 장면이 있는데 이 단순한 멜로디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사가 없는 음악이라 머릿속에서 “미솔미 라솔미레미“ 이런 식으로 음계로 따라 부르곤 했다. 그러다 언젠가 한 번 시험 삼아 생각했던 그 음계로 피아노를 쳐보았는데 TV에서 들었던 그 음과 똑같아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이게 절대 음감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피아노 학원에서 이론 수업으로 절대 음감과 상대 음감에 대한 개념을 배우고 나서 알았다.
#4
어렸을 적 집 근처에는 피아노 악보를 비롯해 머리핀, 반지 등 각종 잡화를 파는 상점이 있었다. 나는 그곳을 '보물 창고'라고 불렀다. 당시 "피스"라고 불렸던 세 페이지짜리 악보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피아노 연주곡으로 편곡해 판매되고 있었는데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하나씩 사 모으는 재미에 빠졌다. 몇 년 전 친정집에 있던 악보들을 우리 집으로 가지고 왔는데 이번에 오랜만에 펼쳐보니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5
중학교에 진학하며 다른 친구들이 그러하듯 나도 자연스럽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학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머리를 비우고 싶거나 위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집에 와 어김없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익숙함과 동시에 약간의 긴장감도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우리 집이 주택가에 위치한 3층 건물이었고 피아노가 창문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칠 땐 일부러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을 지나가는 행인이 내 작은 연주회의 청중이 된 것 마냥 열과 성을 다해 피아노를 쳤다. 나의 연주를 소음이라 여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연주하는 것을 즐기는 작가와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책 리뷰인데 왜 어릴 적 이야기만 주절주절 적나 싶겠지만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은 잠시 잊고 지냈던 나의 어린 시절 피아노와 관련된 여러 에피소드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다. 작가 사드 카하트처럼 악기로써의 피아노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갖고 탐구해 본 적은 없지만 나도 이렇게 피아노를, 그리고 음악을 순수히, 또 열렬히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 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1월 초, 한 재즈 카페에서 라이브 공연을 다녀왔는데 그때의 감상을 인스타그램에 짧은 글로 남긴 적이 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다이어리에 올해 목표 중 하나로 '다시 피아노를 칠 방안을 고민해 보기'라고 적었다. (새해 목표가 늘 그렇듯이) 그 후 아무 진전이 없이 지지부진하던 차에 2월에 읽은 이 책은 나에게 2연타를 날렸다. 집에 관상용으로 모셔만 두고 있는 전자 피아노가 자꾸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천 덮개를 열고 뭐라도 쳐보려고 했는데 기억나는 곡이 하나도 없어 좌절했다.
마침 딸이 내가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그 나이가 되었다. 딸내미는 요즘 가끔 "나 음악가(?) 배우고 싶어"라는 말을 하는데 음악가가 되겠다는 건지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 말인지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랴. 음악을 직업이 아닌 취미로 삼아도 충분히 멋지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이젠 경험적으로 아니까. 나는 이를 슬슬 피아노 선생님을 물색해 볼 때가 되었다는 신호로 이해했다. 딸과 함께 나도 다시 피아노를 배울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뤼크나 안나같은 귀인을 만나면 더 좋고.
좋아하는 마음이 세상은 구하지는 못하지만 나 자신을 구할 수는 있다. 좋아하는 마음을 오래, 그리고 꾸준히 가져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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