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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독서는 취향껏

[책 리뷰]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 오독오독 북클럽

by Heather :) 2024. 5. 29.

   내가 평소에 좋아하고 또 동경해 마지않는 사람들을 열거해 보면 대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본인의 직업, 혹은 주 밥벌이 수단으로 삼는 분야와는 전혀 다른 영역에서 전문가와 버금가는 견문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회사 동료 중 한 분은 회사에서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일하고 계시지만 회사 밖에서는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고 계신다. 비올라를 켜는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라니.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분야에 관심과 호기심을 두고 있긴 하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끈덕지게 파고든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런 사람들이 그저 부럽고 신기할 따름이다.

   이 책도 그런 맥락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의 이 줄리언 반스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그 줄리언 반스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에는 약간 배신감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이내 이 작가가 더 좋아졌다. 그에게 맨부커 상의 영예를 안겨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줄리언 반스가 쓴 책 중 내가 유일하게 읽은 책이었는데, 꽤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아직까지 그 잔상이 남아 있을 정도로 나에게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이 영국 소설 작가가 프랑스 모더니즘 화가와 그들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은 통찰과 혜안을 가질 수 있다니 읽는 내내 놀라웠다.

미술은 잘 모르지만 미술관은 좋아한다. 사진은 유학생 시절 뉴욕 MOMA에서.


   김민철 작가님이 메일에서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셨던 첫 장 제리코 편은 단연 압도적이었다. "처음부터 불길한 징조가 보였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범상치 않다. 첫 장의 무려 13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메두사호의 재난을 묘사하는데 할애한 것은 가히 줄리언 반스가 소설가라 가능한 시도이자 전개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장을 읽는 중간중간 여러 번 놀랐는데, 먼저는 몸이 뒤틀리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극적인 표류선에 대한 묘사가 실화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긴 작품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지막으로 그 작품이 유명한 <메두사의 뗏목>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이 작품을 분명 나도 5년 전 파리 여행 때 봤을 터인데 전혀 기억이 없다. 만약 이 책을 읽고 갔다면 분명 이 작품이 다시 보였을 것이고 또 오랫동안 시선이 머물렀을 것이다.

   첫 장만큼의 강렬함은 없었지만 (첫 장이 워낙 강렬해서다) 마네, 모리조, 세잔, 드가, 메리 커셋 편도 좋았다. 확실히 내 취향에 가까운 인상주의 화풍의 작가를 다룬 편이 보기에도, 읽기에도 편했다. 드라크루아나 판탱라투르 편은 솔직히 잘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그 나름대로 좋았다. 책 제목처럼 멋지게 잘 가꾸어진 미술관을 산책하는 느낌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보통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다양한 화가의 모든 작품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잘 없는 법. 잘 안 읽히는 챕터가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었다. 더 좋아하는, 그래서 더 잘 읽히는 화가의 작품들이 다음 편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멋진 미술관을 가볍게 산책하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사진은 2017년 LA 게티센터.

 
   5월에는 김민철 작가님으로부터 30통에 가까운 메일을 받았다. 거의 하루에 한 통씩 받은 셈이다. 각 챕터마다 언급되는 작품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작가님은 책에서 언급된 작품의 이미지를 하나하나 다 찾아 보내주셨다. (참고로 이 책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작품명만 언급되어 있는 경우도 꽤 있는데 이 점에서 줄리언 반스는 해박하지만 친절하진 않다고 느꼈다. 아니면 그는 '다들 이 정도는 알겠지'라는 생각이었던 걸까?) 각 메일에는 단순히 그림만 보내주신 게 아니라 작가님의 짧은 감상평도 함께 적어주셨다. 게다가 역시 전직 카피라이터셔서 그런지 메일 제목도 한 통 한 통 어쩜 이렇게 맛깔나게 쓰셨는지. 나라면 모든 메일에 동일하게 '[오독오독 북클럽] O장 OO편 그림 보내드립니다' 이렇게 썼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런 메일을 보낼 엄두를 못냈을 것 같다. 이게 얼마나 수고로운 작업인지 짐작이 가기에 더욱더 이 책을 읽을 땐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를 함께 두고 읽었다. 작가님의 메일이 없었다면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아주 많이 헤맸을 것 같다. 

매일 아침 보이차와 책, 그리고 작가님의 메일.

 

   "제가 보내드리는 그림들을 살살 딛으면서 무사히 건너가 주세요."

 
   메일 속 이 한 문장에서 작가님의 따뜻한 마음의 온기가 느껴져 오랫동안 곱씹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나는 12장 르동 편을 읽고 있다. 책이 총 24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제 반 정도 읽은 셈이다. 아직 12통의 메일이 열람되지 않은 채 메일함에 들어와 있다. 남은 챕터들도 작가님이 보내주신 든든한 이정표들을 따라 무사히 잘 건너가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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