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유튜브 <요즘 것들의 사생활> 채널에서 김민철 작가님이 이 책을 추천해 주신 것을 보고 진작에 위시 리스트에 담아 두었지만 차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책. 바로 알베르 카뮈의 <결혼∙여름>이다. 그래서 이 책이 오독오독 북클럽 3월 도서로 선정된 것을 보고 무척 기뻤다. 그리고 3월 약 한 달 동안 이 책을 끼고 살다시피 했는데... 괴로웠다. 이해하고 싶은데... 작가님의 인생 책이라는데... 이 문장을 이해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며 같은 챕터를 읽고 또 읽었지만 텍스트들이 눈으로 들어가 뇌에 도달하기 전에 휘발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버릴 문장이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너무 아름다워 허투루 읽고 싶지 않았다. 꾹꾹 눌러 담고 싶었다. 그렇게 읽고 좌절하고, 다시 읽고 좌절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두 번째 챕터를 넘어가는 데 2주가 흘렀다. 이러다가는 한 달 안에 절대 읽을 수 없겠다는 위기감에 그 이후부터는 문장 하나하나에 대한 집착을 조금 내려놓고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 알베르 카뮈가 묘사하고자 하는 장면, 그리고 그의 생각에 조금 더 집중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책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던 어젯밤, 나는 침대에서 아래의 구절을 읽다가 그만 울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미 한 번, 내게는 청춘의 종말을 점찍어준 여러 해의 전쟁이 끝난 후 얼마 안되어 티파사에 돌아와본 적이 있었다. 나는 잊혀지지 않는 어떤 자유를 거기서 다시 찾게 되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아닌게 아니라 20년도 더 전에 나는 그곳에서 폐허 사이를 헤매어 다니고 압생트 풀냄새를 맡고 돌에 기대어 몸을 데우고 봄이 지나도 살아 남았다가 금방 꽃잎 지는 작은 장미꽃들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아침 나절들을 송두리째 다 보냈었다. 매미들도 진력이 나서 잠잠해지는 시간인 정오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빛의 탐욕스러운 불길을 피해서 도망을 치는 것이었다. 나는 가끔 밤이면 별들이 흐드러지게 돋아난 하늘 아래서 뜬눈으로 잠을 자곤 했다. 그때 나는 그야말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p.158-159)
이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 이유는 아마도 첫 번째 챕터 '티파사에서의 결혼'에 나왔던 장면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티파사에서의 시간은 그가 "결혼"이라고 표현할 만큼 젊고 뜨거운 것이었다. 이제 40대가 된 카뮈의 이 글에서 그 때의 기시감, 지나가버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인생의 무상함 같은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초반에 아등바등 애쓰며 첫 챕터만 몇 번이고 다시 읽은 게 헛된 수고가 아니었다. 덕분에 같은 책 안에 수록되었지만 십여 년의 시간 차를 두고 쓰인 이 문장들이 더 크게 대조가 되어 더 깊게 감정이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효율을 중시하고 FOMO(Fear of Missing Out)가 판치는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서 이런 “시적 산문집” (‘옮긴이의 말’에서 김화영 번역가님이 사용하신 단어를 그대로 가져왔다)은 종종 평가절하되곤 한다. 김민철 작가님이 북클럽 뉴스레터에서도 짚어 주셨지만 이 책은 단순히 핵심만 짧게 요약할 수 있는 그런 글이 아니다. 작가님 표현대로 "거칠게" 요약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요약은 이 책의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그래서 난해하다. 하지만 그래서 아름답다.
솔직히 말하면 어제부로 이 책을 한 번 완독했지만 제대로 이해하며 읽었냐고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이 좋았다. 읽는 내내 자괴감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곱씹으며 담아두고 싶은 문장들이 한가득이라서. 아름다움 그 자체를 찬양하고 헌정하는 글이라서. 삶에 치여 우리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가치를 뒷전에 두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베르 카뮈의 책을 읽으면서 나도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갈구하고, 사유하고, 또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래의 문장처럼 그것만이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니는 유일한 의무일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수라고 여겨지는 것이었다. (p.21)
+ 덧. 이 책을 읽는 내내 (당연하게도) 몇 년 전 여행으로 다녀온 남프랑스의 풍경이 자주 생각났다. 심지어 우린 원래 계획엔 없었지만 에어비앤비 호스트의 추천으로 루흐바항(루르마랭)도 다녀왔었다! 알베르 카뮈라는 작가를, 그리고 이 책을 그때 이미 알았더라면 이 작고 평온한 마을에 대한 감상이 얼마나 더 달라졌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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