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갈 땐 항상 여행지에 미술관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하고 만약 근처에 있다면 자연스럽게 여행 코스에 넣곤 했다. 하지만 빽빽한 여행 일정 중 미술관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2~3시간 남짓.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주요 배경지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포함한 수많은 미술관에 가보았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곳이 잘 없다. (심지어 뉴욕은 유학생 시절 내가 지냈던 볼티모어와 가까워 세네 번 정도 방문했었는데도 그때 갔던 곳이 메트였는지 MOMA였는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그런데 미술관을 철저히 내부자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느낌은? 전 세계 거장들의 미술을 하루종일 원없이 볼 수 있다면?
이 책이 탁월한 부분은 당연하지만 바로 이 점에 있다. 미술관에서 하루에 최소 8시간, 때론 그 이상씩 보내야 (혹은 어느 이에게는 "버텨야") 하는, 일반 관광객이나 미술 전문가가 아닌 바로 경비원의 시점에서 쓰인 미술책이라는 점. 게다가 형의 죽음이라는 큰 상실을 경험한 직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입사하여 보낸 10년이라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 이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졌다니 놀랍고 경이로웠다. 이 책이 워낙 촘촘하고 짜임새 있게 쓰여져 있다보니 체감하기 어렵지만 사실 그의 하루는, 그의 1시간은 메트의 옛 거장 전시관에 등장하는 주민의 수를 전부 셀 정도로 정적이고 때로는 지루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몇 년이 흐른 후 전시실 하나하나를 섭렵하면서 모두 세어본 결과 정확히는 8496명이었다.
(중략)
어떻게 그런 것들까지 모두 셀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면
그건 나에게 얼마나 시간이 많았는지를 실감하지 못해서다.
하지만 그 정적인 시간을 그는 그저 "소비"하지 않고 "사유"하며 흘려보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만의 방식으로 형을 애도했고, 자신 앞에 있는 예술 작품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탐닉했으며, 예술을 통해 인생을 조망했다. 작가가 책에서 설명한 것처럼 경비원이라는 직업군에는 다양한 배경과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이 직업을 가진 모든 이들이 작가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술을 후원하는 부자가 꿈이었던 트로이나, <스와이프> 매거진에 본인의 작품을 출품한 에밀리 같은 인물들이 있는 반면, 이 일을 그저 밥벌이 수단으로만 여긴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의 문제는 아니지만 결국 모든 것은 관점과 태도라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더 하게 되었다.
있잖아, 정말 나쁘지 않은 직업이야.
발은 좀 아프지만 그것 말고는 아무 데도 아프지 않잖아.
작가가 10년간의 경비원 생활을 정리하는 과정이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거창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아서,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이어서 오히려 좋았다. 인생은 때로는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삶은 예술 작품처럼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뚜렷한 서사나 해피엔딩 같은 결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인간에 의해 탄생했고,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생의 많은 부분을 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에서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작품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기도 하고, 미래에는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얻기도 한다. 미술관을 좋아하지만 예술에는 다소 무심했고 무지했던 나도 앞으로는 미술 작품을 더 섬세히 관찰하고 더 깊이 사유하는 노력을 지속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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