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을 봐"
남편이 말했다. 며칠 동안 바이러스에 엎친데 겹친 격으로 미세먼지마저 좋지 않아 창문을 열 엄두도 못 냈었는데, 오랜만에 본 창문 너머에는 언제부터 내렸는지 어느새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전날 오래간만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만삭 촬영을 했는데 촬영이 끝나고 둘 다 에너지 고갈로 집에 돌아온 게 내심 아쉬웠다. 그걸 알아챈 것인지, 아니면 본인도 이런 눈을 오랜만에 봐서 설레었는지, 남편은 바람도 쐴 겸 드라이브를 하고 오자고 제안했다. 이곳저곳 후보지를 검색하다가 우리가 선택한 곳은 양평의 구하우스라는 미술관에 가보기로 했다 (함께 검색한 영은미술관 (광주), 소다미술관 (화성)은 다음 기회에 가는 것으로).
금강산도 식후경
그렇게 결정은 빠르게, 행동은 신속히. 후다닥 준비하고 집을 나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슬슬 배가 고파왔다. 시간을 보니 벌써 2시. 아침을 9시쯤 먹었으니 배가 고픈 게 당연한 시간이다. 다행히 네이버 지도에 예전에 가고 싶어서 표시해둔 식당이 구하우스 근처에 있었다. 식당 이름은 논두렁. 메뉴는 쌈밥. 구미가 당겼다. 다만 3시부터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적혀 있어, 전화를 드려 2시 20분쯤 도착할 것 같은데 괜찮을지를 먼저 확인했는데, 괜찮다며 일단 오라신다. 알고보니 3시~5시 사이에 손님을 받지 않을 뿐, 그전에 식사를 하러 온 손님들은 3시 이후까지도 여유롭게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듯했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유명한 우렁정식 2인분을 시켰다. 주문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애매한 시각이었음에도 4~5 테이블 정도가 차있었는데 그들 중 우리 또래는 없었다. 다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다. 남편이 나의 올드한(?) 취향을 비웃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전식(단호박과 약밥)이 나오고 이어서 메인 메뉴가 나왔는데 상다리가 휘어지는 줄 알았다. 들어올 때 만삭인 내 배를 보셨는지, 음식을 차려주실 때 "제육볶음 일부러 많이 드렸어요"라고 말씀해 주셨다. 헤헷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여기서 찍은 사진은 이거 한 장뿐이다. 정말 하나도 안 빼놓고 다 맛있어서 남편과 내내 이거 먹어봐, 적어 먹어봐 라며 서로 권해주기 바빴다. 사진에는 없지만 쌈채소도 넉넉했고, 대나무통밥은 굉장히 찰졌다. 왜 집에서 하면 이런 맛이 안나는 거지. 반찬이 다 너무 맛있어서 우리는 리필 한 번 안 하고 주어진 반찬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남편이 진짜 오랜만에 기억에 남을 맛집이었다고. 여름이 태어나기 전에 한 번 더 오기로 약속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드디어 구하우스
지도상 구하우스는 논두렁의 바로 강 건너편에 있어 절대거리는 매우 가깝지만, 그 근처에 다리가 없어 한참을 돌아가야 했다. 우리는 차로 30분 정도 더 가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지만, 따뜻한 날씨 때문에 쌓이지는 않았다. 딱 좋았다. 고즈넉한 풍경을 뒤로하고 드디어 구하우스 도착.
블로그에서 봤을 때 아이들도 많이 데리고 오는 곳 같았고, 인스타그램 감성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스팟도 많이 보여 사람이 많아 시끌벅적하지는 않을까 우려했는데 날씨 때문인지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얼마 전, 닻미술관에 갔었을 때처럼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린 느낌으로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었는데, 닻미술관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감상할 작품도 많았다 (닻미술관 후기는 아래 인스타그램에 짧게 적은 내용으로 대체한다).
2층까지 다 감상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1층에 있는 카페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동선인데, 티켓에는 카페 음료 한 잔이 포함되어 있다. 내부가 추운 편이라 난로가에 앉아 몸을 데우며 레몬티 한 잔을 주문해 마셨는데, 카페의 음악과 분위기가 어우러져 나른하게 취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빵순이의 빵지순례
참새가 방안갓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자타공인 빵순이인 나. 특히 요즘엔 재택근무를 시작하며 점심을 먹고 난 후 빵과 함께 디카페인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게 하나의 신성한 의식처럼 되어버렸는데 (마침 며칠 전이 생일이라 지인들로부터 케이크를 잔뜩 받아 집에 케이크 떨어질 날이 없었다), 차 안에서 검색하다가 맛있는 롤케이크 집이 있다는 글을 보았다. 심지어 구하우스에서 차로 2분 거리. 남편과 저녁에 홈카페에서 먹기로 하고 테이크아웃을 해 가기로 한다.
원래 홍대에 있던 곳인데 얼마 전 양평으로 옮겨 더 희소성이 높아졌다. 수요미식회에도 나오고 블루리본도 매년 빠짐없이 받는 공인된 디저트 맛집. 마감 한 시간 전에 방문했더니 이미 다 팔리고 기본 롤케이크 (쉐즈롤)과 쇼콜라 롤케이크만 남아있었다. 첫 방문이니 기본 롤케이크로 먹어보고 싶었으나 기본 롤케이크는 아직 숙성이 덜 되어 다음날 아침에 먹어야 맛있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건 쇼콜라 롤케이크라고 해 그걸로 주문했다. 집에 와서 먹어 보니 크게 달지 않고 고급지게 부드러운 맛.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티케 딸기 롤케이크에 비견되는 맛이었다.
소소한 행복들로 채워졌던, 눈이 오던 2020년의 어느 날의 기록. 끝.
+ 소소한 팁. 쉐즈롤 카페 안에는 구하우스 입장료 10% 할인권이 비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구하우스를 갔다가 쉐즈롤에 들르는 바람에 아쉽게도 사용하지 못했지만, 두 곳을 모두 들를 계획이 있는 분들이라면 쉐즈롤을 먼저 들리는 것을 추천한다 (참고로 인터파크에서도 10% 할인된 가격에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으나, 당일 관람은 불가하다).
논두렁
구하우스
쉐즈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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