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 민음사
★ 3.5
주위를 둘러보면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물론 베스트셀러 작가이니 주변에 이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나와 죽이 잘 맞았던 회사 동료에서부터 팔로우하고 있는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까지.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지 않은 나는 스스로가 "좀 뒤쳐지는 애", "말이 안 통할 것 같은 애" 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누군가가 이 유명한 작가의 책을 어떻게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읽지 "못한"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발간된 책이 너무 많아서 어떤 책을 입문서로 삼아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럼 왜 '노르웨이의 숲'을 첫 번째 책으로 선택했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제목을 아는 그의 저서들 중 가장 오래 전에 발행된 책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87년에 발간되었다).
일단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점은 600 페이지에 육박한 꽤 방대한 양의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이 굉장하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재우고 밤에 한두시간씩 읽기 시작했는데 일주일도 안되어 다 읽어버렸다. 흡입력도 흡입력이거니와 소설 전반적인 분위기가 매우 음울하고 허무주의적이라 어느 날은 읽고 심란해서 잠을 설친 적도 있다 (아마도 치료소에서 레이코가 주인공인 와타나베에게 과거 어떤 경험으로 인해 이 치료소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털어놓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37살의 와타나베가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들으며 20여년 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고교 시절 친구의 자살, 그리고 그 친구의 여자친구 나오코와의 얽히고 설킨 관계, 세상이 자기 발 밑에 있다고 여기는 학교 선배와 주말마다 어슬렁거리며 다녔던 소위 "여자 사냥", 갑자기 주인공의 인생에 불쑥 등장한 8차원 정도 되어보이는 미도리 등. 이 모든 것이 주인공이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휘몰아치듯이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주인공의 주변에 주인공 외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했던 말처럼 그가 비정상적인 사람들에게 끌리고 그들과 계속 엮이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정상보다는 비정상에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주인공도, 주인공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일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느꼈을 감정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이는 각 인물들을 이질감 없이 입체적으로 묘사한 작가의 능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나의 10대, 20대를 반추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만큼 극적인 사건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나도 꽤 불안정하고 불완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의 우리는 누구나 그런 것 같다. 한편으로는 그 시절 나의 호기로움과 풋풋함이 그립기도 하지만 굳이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것도 그 이유에서다. 아마 37살의 와타나베도 마찬가지지 않을까.
+ 덧. 이 책에 대해 추가로 검색하다가 알게된 사실인데,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의 원제는 'Norwegian Wood'로, 노래 가사를 살펴보면 '노르웨이산 가구'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이 오역임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대해서는 몇 년 뒤 '노르웨이의 나무는 보고 숲은 못 보고'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비틀스에 관해 글을 쓸 만큼 비틀스를 잘 알지 못하지만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에 관해서는 쓰고 싶은 얘기가 있다
(비틀스의 노래) 가사의 맥락을 살펴보면 Norwegian Wood라는 말의 애매모호한(규정할 수 없는) 울림이 이 곡과 가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고 그것을 어떤 하나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데는 약간의 무리가 따른다"면서 "노르웨이산 가구로 협의적으로 단정하는 방식이야말로 '나무는 보고 숲은 못 보는 일' 아닐까
(소설) 첫머리의 비행기 장면에 나오는 음악은 역시 '노르웨이의 숲'이어야 했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라고 하면 곤란하지만, 여하튼 나는 그때 그 이외의 음악은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면서 "의식하든 못하든,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내 몸에는 이미 그들의 음악이 오랜 세월에 걸쳐 실시간으로 깊숙이 배어 있음을 실감했다. 아마도 그것이 세대라는 것이겠지.
출처: 연합뉴스 <'상실의 시대'부터 '노르웨이산 가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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