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어족이 온다
스콧 리킨스 / 지식노마드
★ 3.5
어렸을 적 부모님은 나에게 나중에 커서 선생님을 하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안정적이고 방학도 보장되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일반 회사원이셨던 아빠, 그리고 주부셨던 엄마의 눈에 선망되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사실 선생님들의 방학은 지금도 부럽긴 하다. 주변에 선생님이 된 친구들을 보면 방학이라고 무작정 쉴 수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지만). 그들의 희망을 거스르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경영학과에 진학하게 되었고, 그 후 부모님께서는 현실 가능성을 고려해(?) 선생님 대신 공무원과 공기업을 외치시곤 했다. 하지만 대학생 시절 공무원 준비는커녕 대내외 활동으로 바빴던 나는 결국 아빠처럼 사기업의 회사원이 되었고, 그 회사에서 딱 5년을 채우고 모아둔 돈을 탈탈 털어 미국 유학을 떠났다. 미국으로 떠날 당시에는 배움에 대한 욕심도 물론 있었지만, 한국 기업의 보수적인 문화와 비효율에 지쳐 나가떨어진 것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다시 회사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그렇게 하기 싫었던 출근이 하고 싶어 졌고 (졸업 이후 다른 대안이 없기도 했거니와) 다행히 지금의 회사에서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적 부모님의 권유도, 지금껏 쌓이고 다져온 나의 모든 선택과 행보가 결국 '직업'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해당사항은 아닐 것이다. 직업이 자아실현의 수단이자 인생 그 자체로 대변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직업이 없는 삶은 상상해본 적이 없고 은퇴란 아주 요원한 미래처럼 느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불과 그 몇 년 사이에" 이러한 인식이 사회 전반적으로 크게 바뀌고 있음을 체감한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 책 또한 그렇다. 미국의 중산층에 속하는 저자는 잘 나가는 비즈니스맨으로 높은 연봉을 받고, 또 버는 만큼 소비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소위 현재를 살고 있었다. 그러다 출근길에 우연히 들었던 Mr. Money Mustache의 파이어족에 관한 팟캐스트를 계기로 큰 깨달음을 얻는다 (참고로 파이어(Fire)는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약자다). 그리고 결심한다. 현재의 물질적인 풍요를 위해 미래의 삶의 가치를 희생하지 말자고. 그리고 바닷가에 위치한 멋진 (그리고 비싼) 집에서 이사를 가고, 요트 클럽에서 탈퇴하고, 럭셔리 외제차를 판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가까운 미래에 파이어족으로 전환하기 위한 삶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그 어떤 집이나 차, 가전제품도 완벽한 인생을 사는 것보다 가치 있는 '완벽한 소유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경제적 자유를 얻고, 일찍 은퇴하여 남은 시간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삶이라니. 솔깃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뒤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씁쓸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의 타이틀 외에도 다양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맡은 일이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그 안에서 의미와 사명감을 찾고 싶었는데. 조기 은퇴에 혹했다는 것은 나 또한 언젠가부터 일을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 혹은 돈을 받으니 마지못해 하는 것 정도로 평가절하해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였고 그에 따른 씁쓸함이었다.
직업이 곧 인생이라고 여겼던 과거, 그리고 이 근간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요즘.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일의 의미,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파이어족의 장점에 대해 찬양하는 내용이 이 책의 주이긴 하지만, 파이어족이 되었을 때 펼쳐질 장밋빛 미래에 대한 환상을 주입하는 대신 결국 이 또한 선택의 문제이며 trade off 라는 것을 과감히 인정한다. 파이어족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에서 저자가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고민과 시행착오도 가감 없이 소개해줘서 더 좋았던 책이다. 직업, 더 나아가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수많은 대안들 중 하나로서 가볍게 (혹은 진지하게)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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