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최태성 / 다산초당
★ 4.5
2014년, 미국 유학에 대한 꿈을 품고 유학 시 국가 장학금을 신청할 목적으로 한국사 시험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최태성'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이. 오프라인 학원을 다니며 공부할 여유와 의지는 없어 무료 인강을 찾던 중에 당시 EBS에 올라와 있던 그의 인강을 발견해 듣기 시작했고, 그의 현란한 판서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강의 내용에 감탄하며 전 강의를 다 들었다 (뒷심이 부족한 나에게는 매우 드문 일이다). 부끄럽게도 그 이후에 열심히 복습을 하진 않았지만, 시험 전날 벼락치기 신공으로 아슬아슬하게 한국사 1급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 리디북스 (참고로 나는 현재 리디셀렉트(리디북스의 월 정기권 상품)를 이용 중이다) 베스트셀러 카테고리에서 그의 책을 발견했을 땐 마치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괜히 반가웠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내용에 울림이 많았다. 최근 계속 자기 계발서나 경제/경영 서적 위주로 탐독해서였는지 이런 배움은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흡입하듯이 사흘 만에 책을 다 읽었다.
사실 최근 며칠동안 내 안의 많은 생각들과 고뇌들로 심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우울감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므로 그리 놀랍거나 심각한 일은 아니다). 이 중 나를 가장 지치게 했던 생각은 노력과 결과가 항상 비례하지만은 않는다는 쓰라린 진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사실 적고 보니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최근 이유 없이 내 안에서 잠재되어 있던 화와 허무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우울감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상이 원래 이렇다고 순응하거나 욕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책에서 아래의 구절을 읽었다.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눈을 감는 순간 예순여섯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
작가도 읽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님의 글이다. 일가족 전체가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펼쳤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신 분. 청년 시절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일흔 평생 독립운동의 일생으로 답을 했다는 그 구절이 이상하게도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같은 맥락에서 아래의 작가의 글도 기억에 남았다.
역사가 흘러가는 것을 보면 희망이라는 말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와요. 말하자면 역사는 실체가 있는 희망입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조금 더 살아보자고, 버텨보자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단지 조금만 더 멀리 봤으면 좋겠어요.
관성에 젖어 현실에 타협하더라도 꽤 잘 살 수도 있고, 비록 꿈꾸는 이상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살아 생전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내가 움직였을 때 받을 수 있는 모든 부조리함과 질책을 감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이기 때문에 행한 사람들. 절망스러운 그때 그 시절에 비하면 행복에 겨운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근시안적인 사고와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나의 나약한 생각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역사적 사고가 중요하다고 하나보다. 이 책에서 소개된 많은 역사적 인물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내가 과연 후대에 기억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여름이와 여름이의 자녀대 까지는 기억되려나. 티스토리나 워드프레스가 망하지 않는다면 내가 쓴 글 몇 조각들과 함께 예상보다 더 오래 기억될 수도 있겠지), 세상과 타협하며 굳이 쉬운 길을 가지 않겠다고, 그리고 그 길을 택한 이들을 부러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해본다.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일들에 대해 질척거리며 미련을 두지 않고 묵묵히, 그리고 올곧이 내면을 단단하게 다듬으며 내게 주어진 일과 사명을 차근차근 해나가겠다고. 부족할지언정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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