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회사 근처의 교보문고에 들렀다. 가끔 혼자 여유를 부리고 싶을 때 아지트처럼 찾는 곳인데 가장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가 그래도 몇 달 전이니 꽤 오랜만에 찾아간 것이다. 사방에 깔린 책 더미 속에서 오늘은 무엇을 읽을지 행복한 고민을 하다, 제주 독립서점에서 자주 보이던, 그러나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아 고민하다 끝끝내 구입하지 않았던 책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를 집어들었다.
요조님과 임경선님은 내가 처음 알게 된 시기도, 좋아하게 된 계기도 다르지만 특유의 음악 스타일과 필체를 좋아해 평소에도 즐겨 찾던 가수와 작가인데, 이 두 분이 실제로 친한 사이라는 점에서 한 번, 또 이들이 함께 교환일기 형식으로 쓴 글을 책으로 만나볼 수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각별한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는 비밀 편지를 중간에서 은밀하게(?) 훔쳐보는 느낌도 들기도 하고, 무겁지 않은 내용이지만 곳곳에 주옥같이 공감되는 문구도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자리에서 반을 읽었다. 결국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내 손에는 이 책이 함께 들려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홀리듯이 책의 나머지 반을 다 읽어 버렸다. 읽으면서 좋은 구절들을 화자별로 구분해 적어 두었는데, 구분해 놓고 보니 두 분의 문체가 이어져 있으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요조님은 본업이 가수라 그런지 문체가 흡사 노래 가사, 혹은 시 같이 섬세하고 함축적인 느낌이라면, 임경선님은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단단하고 깔끔한 문체랄까. 아래는 내가 에버노트에 기록해둔 책 내용의 일부다.
요조
저는 이제 어려 보이는 것보다 멋지게 늙어가는 일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요
분명히 느끼고 감각하고 있는 내 안의 어떤 생각들이 언어를 찾지 못한 채로 방황하다가, 책을 읽으면서 완벽한 언어의 옷을 찾아 입는 비로소 내 입을 통해 발화가 가능해지는 체험요.
사실 저도 기본적으로 겁이 많아 직언을 잘하는 사람은 아닌데요. 그럼에도 제가 정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라면, 그리고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이 그를 아프게 할 말이라면 눈 꾹 감고 그 사람을 아프게 해야만 한다고 지금은 믿어요.
임경선
앞으로도 시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해도, '핵인싸'가 아니라고 해도, '한물갔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해도, 좋아하는 일을 독립적으로 하며,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너끈히 자유롭게 살아가자.
사실 '비혼'과 '비출산'을 넘어 '탈연애'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지금같은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큰 동기부여인 것 같아.
어떤 사람이 너를(혹은 너의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고 받아들이냐는 너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야.
고민을 하니까 우리는 스스로를 찾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거야.
사실 내일과 모레에 걸쳐 전 팀장님, 그리고 전 팀원분들과 점심 약속이 있다. (아마도) 출산 휴가를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는 자리이기도 하고, 또 새해인만큼 작지만 의미 있는 선물을 드리면 좋을 것 같아 연휴 기간 내내 검색했지만 마땅한 것을 찾지 못해 지난주부터 마음의 무거웠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생각나는 분이 있었다. 한 권 더 사서 선물해야지. 오늘 퇴근길에 한번 더 서점에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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