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차 주말인 토요일에는 남편이 갑자기 아팠다. 원래 지병(이라고 쓰니 왠지 나이든 것 같지만)이었던 이석증이 도진 것이다. 이석증은 발병할 때마다 증상이나 증상의 경중이 다른데 이번에는 고개를 숙이면 어질어질하고 토할 것 같다고 했다. 이석증은 딱히 치료 방법이나 약이 없다. 이탈한 이석이 다시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덕분에 오랜만에 독박 육아 당첨. 오예. 제주에 있던 한 달 중 유일하게 아무런 일정 없이 집에 머물렀던 날이다 (오전에 잠깐 다녀온 동네 마실을 제외하고는).
다행히 그 날 밤부터 남편의 컨디션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남은 기간 더 부지런히 다녀야지 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제주에서의 생활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그간 너무 여름이 위주로 다녀서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서점이나 편집샵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래서 마음 먹었다. 남은 한 주는 여름이에게 너무 양보하지 말고 (이미 식사 시간이나 낮잠 시간 등 여름이를 충분히 배려하고 있으니) 내가 그간 가고 싶었던 곳들도 부지런히 다니자고.
이런 결심을 한 날 처음으로 들른 곳은 여름이가 차에서 낮잠을 자는 동안 다녀온 만춘서점.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운영되고 있는데 부담 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참여하고 있는 북클럽에서 추천 책으로 간간히 보이던 ‘긴긴밤’이 보여 반가웠다. 이 책을 데려올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이미 짐이 넘쳐나는데 잘 참았다.
그리고 또 왔다. 오브젝트늘. 정말 나도 징하다 하핫. 2주 전 오브젝트늘에서 샀던 목걸이와 팔찌를 이미 문신처럼 하고 있었는데 떠날 날이 다가오니까 왠지 한 번 더 가야만 할 것 같은 거다. 오픈 시간인 3시에 맞춰 갔지만 또 어마어마한 기다림 끝에 입장, 또 뭐 살 거 없나 기웃거리다 목걸이 두 개와 팔찌 하나를 데려왔다. 이 놈의 물욕은 항상 오브젝트늘에만 오면 폭발한다.
오브젝트늘에서 쇼핑을 마치고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지도에 저장되어 있길래 (언제 저장했는지도 모름) 들른 카페 플레이스 엉물은 정말 좋았고요.
일요일 마지막 일정으로 들른 소심한 책방. 문 닫기 30분 전에 가서 거의 훑는 수준으로 보고 왔는데 생각보다 널찍해서 놀랐다. 하루 날 잡고 와서 진득이 앉아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름아, 무럭무럭 자라서 다음에 엄마랑 책 읽으러 오자.
마지막 주는 주중에도 부지런히 다녔다. 하루는 오전 근무를 마치고 숙소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그 바로 맞은 편에 있던 라바북스 라는 서점에 들렀다. 그간 동네 산책하며 수없이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야만 했던 곳. 아무래도 서점 내부가 아담해 보여 여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남편에게 잠깐 아기를 맡기고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생각대로 아담한 공간이었으나 책 큐레이션이 정말 내 스타일었던 곳으로 기억한다. 무과수의 '안녕한, 가'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돌아왔다. 정신 차려, 이미 한 달 동안 세간이 불어 차에 다 안들어갈 판이야.
제주에서의 공식적인 마지막 근무 날이었던 목요일에는 차로 1시간 넘는 거리에 있던 유람위드북스에 갔다.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항상 순위권 안에 드는 곳. 이곳을 처음 알게 된 이후부터는 제주에 올 때마다 한 번도 빠짐없이 들르고 있다. 최근 위치를 이전한 이북카페는 더 넓고 세련되졌다. 하지만 원래 그 공간이 주던 편안한 분위기도 유지하고 있어서 좋았다. 숙소가 조금만 더 가까웠다면 더 자주 오는 건데. 업무를 보느라 정작 책은 몇 줄 읽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지만 그래도 갔으니 됐어.
마지막 주 금요일은 휴가를 냈다. 어른과 아이 모두 만족할 만한 곳을 검색하다가 스누피 가든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붐빌 거라 생각해 일부러 오전에 갔는데 그래도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영화관, 학교 등 여러 가지 콘셉트로 꾸며진 전시관은, 이곳의 공간 기획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어른과 아이 모두 좋아하도록 지나치게 유치하지도, 또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았던 곳. 내부 전시와 외부 공원 모두 좋았던 곳. 의도친 않았지만 역시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몰리나보다.
아쉬운 마음에 더 압축적으로 부지런하게 돌아다녔던 마지막 주. 너무 더워 난감했던 10월 초반의 2주와, 단 하루 비온 뒤 기온이 훅 떨어져 일정 내내 쌀쌀함을 유지했던 마지막 2주. 짧은 한 달이었지만 여러 계절을 느끼고 아름다운 장소들을 눈에 담고 올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렇게 제주에서의 짧은 기록은 끝. 다음 포스트에서는 제주 한 달 살기를 하며 가장 만족스러웠던 공간들을 추려 정리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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