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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일상이 특별해지는 기록

어느 링글 수업에서 나눈 멋진 대화 (feat. 죽음의 수용소에서)

by Heather :) 2022. 5. 27.

복직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회사 지원으로 화상영어 플랫폼 링글 (Ringle)에 등록해 수업을 듣고 있다. 튜터들은 대부분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인데 간혹 직장인이나 본인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만나곤 한다. 며칠 전에는 David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 혼혈의 영국인 친구와 수업을 했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며 JLPT 자격증 2급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급하게 예약한 수업이라 (링글에는 '24시간 이내 수업'이라는 메뉴가 있다) 별도의 정해진 주제 없이 프리토킹을 할 생각으로 들어갔고 그간 수업 경험상 각자의 직업, 사는 곳 등 기본적인 소개만 해도 수업 시간인 40분은 훌쩍 채우기 때문에 또 의례 그런 가벼운 이야기를 하다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책'을 주제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David가 나의 인생 책이 무엇인지 물었고 내가 여러 책 중에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떠올린 것이 대화의 물꼬를 틔워주었다. 이 책을 말하자 그의 눈이 갑자기 반짝반짝 빛나더니 Zoom 배경에 자리 잡고 있던 본인의 책장에서 바로 책을 꺼내 보여주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라고 했다.

빅터 프랭클 &amp;lsquo;죽음의 수용소에서&amp;rsquo;. 영문서 제목은 &amp;lsquo;Man's Search For Meaning&amp;rsquo;이다.


아래는 우리가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참고로 내가 대화 내용을 다 기억해 받아 적은 것은 아니고 (그럴 능력도 없지만), 링글에서 수업 내용을 녹음해 자동 스크립트를 만들어 제공해 주고 있는데 그걸 복사해 다듬고 번역한 것이다)

David: One of the sentences that really stuck with me was when he said it was not the physically fittest that survived, but it was the people who were intellectually fit; the people who were able to critically reflect on their own situation, who had the knowledge and were able to critically apply that knowledge to their situation.
정말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은 작가가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지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적은 부분이었어. 자신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사람, 현실 파악이 되고 그것을 자신의 상황에 객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사람 말이야.

나: Right, right.
맞아, 맞아 (나는 계속 추임새만 넣고 있음)

David: This really emphasized to me the importance of learning, of lifelong learning. Like us, as human beings, I think it's a very profound insight that not stopping to learn is crucial for our survival. This is what sets us apart, probably and this is our evolutionary advantage. We're not physically strong animals if you compare us to a bear or a tiger, but it's this creativity and the curiosity, the hunger for knowledge and experience that give us an edge. And I think that really stuck with me and I keep coming back to that sentence.
결국 배움, 평생 배우는 자세를 갖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 배움을 멈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생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심오한 통찰이라고 생각해.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의 진화적 이점인 거지. 인간이 사실 곰이나 호랑이 같은 동물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신체를 가지고 태어났잖아. 그럼에도 우리를 우위에 서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인간이 가진 창의성과 호기심, 지식과 경험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라는 말이지. 이 부분이 너무 인상 깊어서 자꾸 머리에서 맴돌았어.

나: Wow, you've already got the gist of the book!
너 이미 이 책의 핵심을 다 꿰고 있구나!


이렇게 멋진 생각을 가진 튜터라니! 무심코 이 책을 말하고 나서야 튜터가 독일계 영국인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아차 실수했다' 싶었는데 (참고로 이 책은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된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다), 전혀 편견이나 불편함 없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본인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보며 편견을 가진 쪽은 나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도 대화는 이어졌다.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영문서 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 ('인간이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과정'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인데 사실 독일어로 쓰인 원서 제목은 한국어 제목과 비슷하다 등등 이 한 권의 책에 대한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40분을 훌쩍 넘겼다. 마지막에 유익한 대화를 해서 기쁘다고 말했더니 본인도 즐거웠다며, 처음에 인생 책이 뭐냐고 물었을 때 레이 달리오의 <변화하는 세계 질서> 같은 책이 아니라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말해줘서 고맙다는 유머 섞인 멘트로 마무리하며 수업은 종료되었다.

나는 영어 학습을 위해, 그리고 그는 용돈 벌이를 위해 만난 것이지만 가끔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나면 신기하다. 나와 다른 곳에서 태어나 너무나 다른 배경과 경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나 비슷할 수가 있구나, 또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생각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과 태도가 너무나도 멋져 배우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드는 튜터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그리고 이런 친구들과 40분짜리 밀도 있는 대화를 하고 나면 그 에너지와 들뜬 기분이 하루 종일 지속되는 느낌이다. 이게 바로 David가 말한, 그리고 빅터 프랭클이 책에서 역설한 진정한 배움의 힘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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