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세이/꿈은 일잘러입니다

싱가포르 7박 9일 출장. 정리되지 않은 생각 뭉텅이들.

by Heather :) 2022. 9. 30.

일주일간의 싱가포르 출장 일정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호텔에서의 마지막 날 밤에 쓰는 글. 정제되지 않은, 날 것에 가까운 생각들을 뭉텅뭉텅 뱉어내는 수준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기록해보려고 한다.


# 1. 삼촌 가족과 주말 나들이

 

주말 중 하루는 삼촌 가족을 만났다. 삼촌네 가족은 20년 전에 싱가포르로 넘어가 사업을 시작해 멋지게 정착하셨다. 삼촌, 숙모, 그리고 현재 싱가포르 군대에 복무 중인 (경찰서에서 복무 중이라 집에서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작은 사촌 동생도 만났다. 하루 종일 멋지고 좋은 것만 보여 주시려고 여기저기 데리고 가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나도 이제 어느덧 10년 차 회사원이라 돈을 버는데도 삼촌 눈에는 아직 내가 10살 꼬마로 보이는지 하루 종일 돈을 한 푼도 못쓰게 하시고 심지어 헤어질 때 봉투까지 쥐어주셨다.

사소한 농담에도 깔깔거리며 웃는 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호텔방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묘했다. 그땐 어려서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낯선 환경에서 이민자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녹록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가족에게 배어있는 긍정의 자세에서 그 힘든 세월을 겪으며 얻어진 단단함과 내공이 느껴져 부러웠다. 물론 내가 본 것은 단 하루라 단편적인 모습일 테지만,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에 많이 가까워 그렇게 느낀 것 같다.

가든스바이더베이
가든스바이더베이
이 멋진 노을과 풍경을 보며 저녁 식사를.
저녁에는 가든스바이더베이에 이런 멋진 야간쇼도 있다.



# 2. 회사에서의 첫 발표


새 회사에 입사한 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출장을 갔고 또 출장지에서 발표도 하나 했다. 아직 회사가 돌아가는 상황도 잘 모르는데 심지어 영어로 발표를 해야 해 너무 떨리고 막막해 오랜만에 잠도 설칠 정도로 초긴장 상태였다. 실제 발표에서는 말도 조금 더듬고, 긴장한 탓에 속사포처럼 이야기하는 바람에 발음도 군데군데 뭉개지고, 그래서 예상한 시간보다 조금 빨리 끝났지만, 망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 첫 술에 배부르랴. 수고했어.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겠지.

유튜브에 라이브 스트리밍된 것을 캡처해왔다.

 



# 3. 가면 증후군, 그리고 업계에 대한 약간의 회의감

 

이번 출장의 목적은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업계 대규모 컨퍼런스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는데, 업계에 대해 아직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출장을 와서 발표도 하고 그 다음날부터는 바로 회사 부스에서 서포트를 했더니 소위 가면 증후군이라 말하는 현타가 세게 왔다. 외부인들이 회사 부스에 들어와서 나랑 눈만 마주쳐도 심장이 두근두근. 벼락치기해서 공부한 내용으로 어느 수준으로 설명을 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혹여나 내가 모르는 내용에 대한 질문이 나올까봐 또 쿵쾅쿵쾅. 지금 이 업계는 아직 매우 초기 단계라 많은 투자자들과 스타트업들이 달려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틈만 나면 사업 기회를 물색한다. 컨퍼런스 참여 비용만 인당 백만 원을 호가하는데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조금이라도 자기네 회사를 알리려고 서로 앞다퉈 브로셔와 회사 로고가 박힌 굿즈를 나눠준다. 오후 내내 부스에 있어보니 오는 사람들은 딱 두 분류로 나뉘었다. 우리 회사를 통해 사업 기회를 만들고 싶은 사람, 그리고 그저 공짜 굿즈를 받으러 온 사람. 밤에 각 회사에서 주관하는 애프터 파티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업계에서 잘 나가는 어떤 회사에서는 센토사 섬에 있는 해변을 빌렸다고 한다. 사전 신청만 하면 술과 안주가 무제한이니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회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매일매일 하루에 2~3개의 애프터 파티를 다니는 분도 계셨다.

그 와중에 나 혼자 꿋꿋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또 혼자 조용히 구석에서 커피를 마셨다. 사람들을 만났을 때 업계 관련 이야기를 할 자신도 없거니와 사람들에 너무 치여 커피라도 조용히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컨퍼런스에서 남은 음식이나 나오는 쓰레기 양이 어마어마할 텐데를 걱정하는 사람도 나뿐인 것 같았다. 왠지 나 혼자 부적응자가 된 느낌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주관하는 애프터 파티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석한 애프터 파티였는데, 같이 부스를 지키며 친해진 동료 몇 명들과 조용히 칵테일만 마시다가 집에 들어와 넷플릭스로 <스카이 캐슬>을 새벽 3시까지 보다가 잠들었다.

 

# 4. 외국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 회사는 본사가 싱가포르에 있어 본인이 원할 경우 싱가포르 비자를 지원해준다 (다른 분들과 이야기해보니 다 되는 건 아니고, 회사에서 선발되더라도 개발자 외에는 비자를 받기가 수월친 않은 것 같기는 했다). 기회가 주어지면야 만사 제치고 가야지 싶다가도 막연히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나의 오랜 꿈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점검해본다. 나는 무엇을 위해 외국에 살고 싶은가?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이 될 테니까 - 같은 무책임하고 막연한 대답 외에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행사 끝나고 아이스크림 사들고 혼자 야경보며 걸어가기



# 5. 아기가 보고 싶다


아기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본 적이 아기가 태어난 이후 처음이다. 출장 일정이 일주일이니 길지도 않고 딱 좋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기가 미칠 듯이 보고 싶다. 싱가포르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가 아침 또는 늦은 밤 밖에 없어서 후자로 택했는데 매우 후회스럽다. 오늘은 아기와 영상 통화를 하다가 아기가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듣고 펑펑 울어버렸다. 아기가 생기기 전에는 절대 느끼지 못했을 감정의 파도를 근 2~3년 동안 다 경험하고 있다.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은 때론 힘들고 지치지만, 그래도 함께라 행복하다는 것을 이렇게 떨어져 보니 다시 느낀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