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새 회사에 온 지도 3개월이 되었다. 모든 이들의 첫 3개월(보통 회사에서 수습 기간으로 책정하는 시기)이 그렇겠지만 나 또한 정신없이, 그리고 밀도 높은 시간을 보냈다. 입사한 지 1개월 반 만에 출장을 갔고, 또 출장에서 발표까지 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영어로.
새로운 직장에서 새로운 동료들과 일하며 기존에 해왔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을 배운 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이 과정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아니, 오히려 괴로운 시간이다. 어제는 아기를 재우고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과적으로는 지금 내 커리어가, 그리고 회사에서의 내 포지션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고, 이것을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이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내면에 있는 방어 기제, 다시 말해 끝까지 가보기를 두려워하는 성격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끝을 봤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수능 시험 이후로는 요원한 듯하다. 인생 전반에서 나는 대체적으로 모든 게임을 안전하게 플레이하려고 했던 것 같다. 나를 곁에서 봐온 친구들은 이 말에 코웃음을 칠 수도 있다. 네가 뭘 안전하게 살았냐고. 혼자 회사도 그만두고,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남편을 두고 유학도 다녀오고. 호기로운 짓은 너 혼자 다 하지 않았냐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에게는 다소 무모해 보일 수 있는 그런 선택들도 나로서는 여러 시나리오와 변수를 고려한 뒤 취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런 안전한 선택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지금처럼 어느 한 분야에서 뚜렷한 두각을 내지 못하고 고만고만하게, 하지만 그 결핍은 계속 인지하고 있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은 내 이야기를 쭉 듣더니 내가 나의 단점으로 생각하는 그 성격이 바로 가장 큰 장점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은 어느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보고 달리는 대신, 나머지는 다 제쳐두는 성격이라 업무에 과부하가 걸리거나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냥 포기해 버리고 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아 놀란 적이 많다고 했다. 자신이라면 진작에 포기했을 어려운 일들을 나는 꾸역꾸역, 하지만 하나하나씩 다 해내고 있었다고. 비유하자면, 본인은 국영수 중에서 국어만 100점이고 나머지는 2~30점밖에 못 받는 성격인데 나는 전 과목에서 70점씩은 받고 있는 거라고. 그리고 그게 더 어려운 것이라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자신은 수포자가 되지만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모든 과목을 75점, 80점, 90점으로 올릴 수 있게 되는 거라고. 그 과정이 비록 매우 더뎌보일 수는 있겠지만 그럼에도 매일매일 성장하고 있다고. 그리고 언젠가 좋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간 내재화해왔던 그 실력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그 말이, 그 비유가 큰 위안이 되었다. 나이도 어린데 비범하고 특출 난 분들이 즐비한 이 업계에서 자꾸만 나 자신이 초라하고 작게 느껴졌다. 이 변화무쌍한 곳에서 나의 미래가 뚜렷이 그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비록 어느 한 분야에서 특출 나지 않더라도 계속 성장하는 마인드셋을 가지고 있다면 미래는 점점 뚜렷해질 것이고, 나에게도 언젠가는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정리되지 않은 채 마구 몰려드는 일과, 또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뒤엉켜 어느덧 3개월이 지났고 어찌어찌 수습은 통과했다. 분명 지금이 이 회사에서 있는 동안 가장 어려운 시기였을 것이고 앞으로는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단점에 집중하느라 내 장점을 가리는 우를 범하진 말자. 훨훨 날지는 못해도 끊임없이 도약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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