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얼마 전 아기를 낳았다. 매일 아기 사진과 영상을 보내주는데 그 치명적인 귀여움에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려보고 있다. 출산 전 동생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육아용품을 대부분 물려줘서 예전에 여름이가 입던 옷이 사진과 영상 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우리 여름이도 이렇게 작았던 때가 있었는데’ 하며 흐뭇한 생각에 잠기곤 한다.
* 참고로 여름이는 태명이다.
여름이가 태어난 지도 어느덧 3년 하고 4개월이 지났다. 어린이집에서는 벌써 둘째를 낳은 부모들도 꽤 보이고, 여름이 친구가 이미 둘째인 경우도 많다. 어릴 때부터 아기를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여동생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는 결혼하기도 훨씬 전부터 아이는 낳으면 무조건 둘이라고 생각했다. 뼛속까지 계획형 인간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과거형인 이유는 아이를 낳은 이후 계획대로 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땐 호기롭게도 첫째는 언제쯤 낳고, 둘째는 언제쯤 낳을지도 계획을 했다. 하늘의 뜻이라는 임신이 정말 감사하게도 계획한 시기에 되었고,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지금 이맘때쯤 둘째를 낳았어야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나면 나의 어릴 적 치기에 그저 웃음이 난다. 내가 철이 없고 오만했구나. 보통 과거의 기억은 어느 정도 미화되기 마련임에도 지난 3년은 행복한 만큼 또 괴로운 시간이기도 했다. 육아 선배들은 행복이 괴로움을 상쇄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실제 경험해 보니 이 두 상반된 감정은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것에 가까웠다. 지나고 나서 보니 이게 바로 산후우울증이었을까 짐작만 하지만 그 파장은 꽤 깊고 오래 남았다. 이 시기에 남편과도 지리멸렬하게 싸웠다. 연애와 결혼을 포함해 10년을 함께 했는데도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때의 증오와 서운함, 안정감과 전우애(?) 같은 여러 감정이 더해져 남편과의 관계도 출산을 기점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것 같다.
최소 앞으로 아이의 20년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도 아이를 낳기 전에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다. 나 하나 건사하기 힘든 세상인데, 하나는 잘 몰랐으니까 어찌어찌 낳았다 치고, 이 책임감과 중압감을 알고도 한 명 더 낳는다는 선택을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둘째를 가지게 된다면 아마 팔할은 여름이 때문일 것이다. 여름이를 데리고 형제자매가 있는 집에 놀러 가거나 그들이 우리 집으로 놀러 온 적이 있다. 그들이 오랜 시간 함께 먹고 자고 싸우는 과정에서 공고히 구축해 놓은 세계에서 여름이가 살짝 겉도는 느낌이 들 때 안쓰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훗날 나와 남편이 죽고 여름이 혼자 상실의 슬픔을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또한 속이 아리다. 물론 그때 여름이도 곁에 배우자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배우자가 형제자매를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으니까.
내년이면 나도 생물학적으로 노산에 속하는 나이가 된다. 가만히 있던 모래시계가 한 바퀴 돌아 작동된 느낌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기분으로 경솔하게 하나의 생명을 품고 평생 책임지겠다는 선택은 감히 할 수 없다. 비록 부족하고 모자란 부모일지라도 여름이에게 주었던 만큼의 관심과 사랑을 쏟아주어야 함을 알기에 일말의 의심이라도 허용할 수 없다. 아마 이 고민은 가임기를 벗어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 같다.
아참, 내가 둘째를 고민하는 이유의 나머지 이할는 바로 이 뽀시래기같은 아기에 대한 그리움이다. 내 손가락 마디만큼 작은 손발이, 가슴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체구가, 보들보들한 살이, 저절로 코를 킁킁거리게 하는 아기 냄새가 몹시 그립다. 내일은 드디어 동생과 아기를 보러 본가에 간다. 꼬물거리는 아기를 오랜만에 볼 생각에 벌써부터 들떠 있는데, 보고 나면 금세 이 20%가 80%로 역전될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래, 역시 내 기억이 미화된 거였어. 육아는 힘든 것이었군.' 하며 0%가 될지도 모르고. 아무튼, 이건 정말 선택의 문제고, 경험해 보기 전엔 알 수 없는 문제다.
그 애가 마지막으로 잠시 나를 돌아본 뒤 자신만의 우주를 향해 날아갈 때,
나는 그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아주리라.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 심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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