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엄마가 26년 동안 다니신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셨다. 그날도 업무에 치여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 까맣고 잊고 있었는데 엄마가 가족 카톡방에 보내신 (동료들로부터 받은) 꽃다발 사진을 보고 아차차 했다. 서둘러 축하한다고 답장을 보내니 아쉽고 허전하다는 우리 엄마.
제삼자의 눈으로 봐도 매우 고되고 고생스러운 일이라 가족 모두 입 모아 이제 제발 그만두라고 말한 지 10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결국 정년을 채우시는 것을 보며 역시 엄마는 엄마구나 싶었다. 남편이 종종 내게 "나는 너의 존버(?)가 부럽다"라고 말하는데, 이건 진정한 존버의 대마왕인 우리 엄마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에게 아주 티끌만큼이나 존버 정신이 있다면 이건 전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거다.
한 직장에서만 무려 26년이라니. 일단 총경력만 놓고 봐도 비교 불가능이지만 한 회사에서 5년 이상 다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참고로 4년 넘게 잘 다니고 있는 지금 회사도 곧 이직을 앞두고 있다) 엄마의 무던함과 우직함이 때론 답답하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부럽다. 또 그 와중에 온갖 살림을 하고, 맏며느리로써 제사와 각종 경조사를 챙기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십수 년을 간병하고, 지금은 양가에서 혼자 남으신 외할머니를 살뜰하게 챙기는 엄마를 보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 시대에는 다 그렇게 살았다고 뭉퉁그려 설명하기엔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이 감정과 생각은 아기를 낳은 이후 더 크게 증폭되었는데,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가 되는 일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리는커녕 거의 매 끼니를 배달 음식과 라면으로 연명하고, 아기가 투정을 부리거나 아플 때마다 어쩔 줄 모르며 징징거릴줄만 아는 나는 아직 멀어도 한참을 멀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지난주부터 아기 어린이집에서 수족구가 돌고 있는데 다른 대안이 없어 무책임하게도 계속 어린이집에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새벽에 자다가 아기와 몸이 닿았는데 너무 뜨거워 열을 재보니 38.8도였다 (그리고 결국 저녁에 40도를 넘겼다). 하지만 오전 업무와 미팅을 취소할 수 없어 아침부터 남편과 차를 몰고 시댁으로 아기를 데려다 놓고 오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힘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업무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일도 못하고 아기도 못 보는 아니러니한 상황. 오늘도 뭐 하나 제대로 해낸게 없다는 자괴감.
그래서 그 시절을 지나 지금에 이른 엄마가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생의 굴곡들을 지나 정년까지, 문자 그대로 “끝을 보셨다”는게 멋지고 자랑스럽다. 카톡 메시지를 보니 본인은 정작 스스로가 멋지거나 자랑스럽지 않은 듯하여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귀가 닳도록 주지시켰다. 아무나 못하는 그런 일을 해내신 거라고.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 이어진 대화의 말미에 엄마는 이 일은 끝났지만 자신에게 새로운 일을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퇴직 이후 엄마는 시어머니와 나누어 아이를 봐주시기로 하셨다). 엄마를 떠올리면 자주 코 끝이 시큰하다. 엄마, 나는 절대 엄마같은 엄마는 될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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