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이 언제 오나 했는데
약 한 달여간의 재택근무를 마무리하고 어제는 오후에 잠깐 사무실을 들렀다. 마지막 근무일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짐들을 챙기고, 노트북과 모니터 등 가지고 있던 자산을 보관하고 (이 와중에 iMac은 팀장님 결재를 받고 집에 들고 오기로 했다. 휴직 기간 동안 틈틈이 Sketch 공부를 하고 싶어서였다. 생각보다 부피가 커서 옮길 때 남편이 고생했다), 팀원분들의 자리에 미리 준비해 간 선물과 편지를 살포시 놓아두었다. 이번 주부터 전 사원 재택근무가 권장되어 팀원뿐만이 아니라 층 전체에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들 사무실에 복귀해 발견했을 때 작은 행복감을 선사할 수 있는 그런 선물이 되었으면.
감사의 마음을 담아,
팀원분들의 선물은 꽤 오래전부터 고민했었다. 사실 미리 생각해둔 선물이 있긴 했다. 바로 블라인드북. 지난 제주도 여행 때 책방 소리소문이라는 곳에서 처음 알게 된 컨셉인데 (이전 포스팅 참고), '블라인드북'이라는 이름 그대로 책의 표지를 포장지로 가리고 단순히 포장지에 적힌 키워드로만 책을 골라 구매하는 방식이다. 포장을 뜯기 전까지는 어떤 책인지 알 수 없다니. 책을 제목부터 목차, 그리고 저자의 문체까지 선별(?)해서 읽는 편인 나는 이런 방식이 왠지 꽤 risky 하다고 느껴져 결국 구매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대신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구입했더랬지) 굉장히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면 실제로 선물을 주고받는 메커니즘과 비슷한 면도 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열어보기 전까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선물은 내용물에 상관없이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기대감과 설렘을 주니까.
서울에 돌아와 검색해보니 많지는 않지만 비슷한 컨셉으로 블라인드북을 파는 서점이 꽤 있었다. 그중 눈여겨봐둔 곳이 바로 꿈꾸는 별책방이라는 곳이었는데, 이 곳은 블라인드북에 생일이라는 컨셉까지 더해, 일명 '생일책'이라고 부르는 서적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선물을 받을 사람과 동일한 생일을 가진 작가의 책을 포장해 블라인드북의 형태로 판매하는 것이었다. 꽤나 의미 있는 선물이 될 것 같았다. 본점은 광명에 있지만, 홍대에도 팝업스토어처럼 오픈하고 있어, 일요일 신촌에서 영어 스터디가 끝나고 한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캘린더에서 팀원분들의 생일도 찾아 미리 적어 두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바이러스 전파 속도가 과속화되었고, 나는 신촌은커녕 집 앞에 있는 석촌호조차 나가지 못하고, 또 그 무렵 회사에서 재택근무를 권장해 강제 칩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가까운 백화점도 다녀오기 어려울 상황이라 온라인에서 꽤 오랜 시간 검색을 했다. 블라인드북처럼 꽂히는 선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자고로 선물은 내 돈 주고 사기는 아깝지만,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주라고 했던가. 선물의 기본 원칙(?)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프레쉬(Fresh) 비누. 비누 치고는 비싼 가격이지만 (개당 22,000원) 평이 좋았다. 특히 향이 좋아 책상 서랍에 두고 비누 대신 방향제로 활용한다는 글도 많이 보였다. 의도치 않았지만 현 시국에도 잘 맞는(?) 선물이 될 것 같아 베스트셀러로 5개를 주문했다. 결제 시 선물 포장을 요청한다고 적어두었더니 이렇게 예쁘게 포장되어 왔다 (살짝 과대 포장인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리고 그날도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나 한 분 한 분께 감사의 마음을 글로 적어 선물에 함께 끼워두었다.
한층 더 성장한 모습으로 만나요
적다 보니 선물에 대한 글이 너무 길어졌다 (오래 고민했었기에 쓸 이야기도 많았나보다). 자리 정리가 끝났다. 누가 쓰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깨끗하게 비워졌다. 출근하신 분들께 한 분 한 분 인사를 드리고, 업무를 하던 그룹 채팅창에도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란다고. 축하와 축복의 메세지가 이어졌다. 이윽고 정규 퇴근 시간인 7시가 넘고 채팅방을 하나씩 나갔다. 기분이 이상했다. 진짜 마지막이구나. 하지만 퇴사가 아니라 휴직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동안 이 날에 대해 일기를 쓰며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해보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덤덤했다. 시원섭섭함, 막연함,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은 남아있었지만 감정이 더 이상 격해지진 않았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한동안 '직장인'의 모습은 벗어버리고, '아내, 그리고 '엄마'의 역할에 충실한 나날들이 될 것이다. 월요병을 걱정하는 대신, 오늘은 무슨 요리를 할까를 고민하는 시간이 이어지겠지. 규칙적인 출퇴근 시간이 사라지고, 24시간 여름이의 엄마로 대기하는 시간들의 연속일 것이다. 2011년 입사 이후 9년만에 처음 맞이하는 장기 휴직, 그리고 30여 년 만에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역할 (role). 잘 해내고 싶다. 그리고 이 기간을 잠시 커리어에서 단절되는 기간이 아닌, 경험의 폭이 넓혀져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로 삼고 싶다. 여름아, 그동안 엄마랑 같이 출퇴근한다고 고생 많았어. 이제 여름이에게 집중하는 한 해를 보낼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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