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임신 기간은 매우 교과서적인 편이다 (현재까지는).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입덧이 임신 16주 즈음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회사-집 만 좀비처럼 다니던 시기가 끝나고 뭐라도 먹을 수 있게 되니 삶의 의욕도 함께 되살아났다. 그때부터였다. 태교여행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 검색창에 "태교여행"을 쳐보니 역시 괌이 가장 많이 나왔다. 비행시간도 4시간 정도로 짧은 편이고, 날씨도 사계절 내내 따뜻하고, 무엇보다 대표적인 휴양지라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져 "태교"의 목적에 잘 부합해 보였다 (실제로 내 주변에서도 태교여행으로 괌을 가장 많이 다녀온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여행은 아니었다. 이래 봬도 인도 한 달 배낭여행도 하고, 네팔 히말라야 ABC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등반도 한 하드코어 여행인이라고.
검색어를 좁혀보기로 했다. 먼저 "유럽 태교여행"을 검색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기 시작하면 적어도 앞으로 5년간은 유럽에 발 디딜 일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네이버 카페를 살펴보니 실제로 컨디션이 괜찮다면 평소에 자주 가보지 못하는 유럽 같은 곳을 태교여행으로 추천한다는 댓글들이 많이 있었다 (정작 이들 중에 유럽으로 태교여행을 다녀와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블로그에도 후기가 많지는 않지만 있긴 했다. 하지만 이미 유럽의 어느 국가에 정착해 살고 있는 부부가 옆에 있는 유럽 국가로 태교여행을 가는 케이스가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10시간이 훌쩍 넘는 비행시간이 걸렸다. 평소라면 발 뻗기도 힘든 이코노미석에서 12시간 버티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테지만, 아무래도 홀몸이 아닌지라 조심스러워졌다. 비행기에서 긴급한 상황이 생기면 어떡하지? 명색이 "태교여행"인데 여름이(태명)를 너무 혹사시키는 것 아닐까?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어 덜컥 겁이 났다. 별 일이 없더라도 (아마 그랬을 테지만) 여행 기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며 다니고 싶지 않았기에 깔끔히 포기.
다음으로 생각한 여행지는 몽골이었다. 몽골은 몇 년 전부터 다이어리에서 올해 가고 싶은 국가 상위권에 등재(?)되어 있었던 여행지였다. 내가 상상하는 몽골은 하루 종일 말을 타고 정처 없이 이동하다 게르에서 별을 보며 잠드는, 그런 곳이었다. 여행기간 내내 아무 이벤트 없이 그렇게 하고만 돌아와도 엄청난 힐링이 될 것 같았다. 직항을 타면 4시간도 걸리지 않기에 비행시간도 적절했다. 문제는 날씨였다. 내가 태교여행을 갈 수 있는 시기(= 임신 안정기)는 겨울인데 겨울의 몽골은 무려 영하 40도(※ 체감 온도 아님 주의)까지 내려가는 어마 무시한 곳이었던 것이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추위에 만큼은 항상 굴복하고 마는 전형적인 소음인인 나에게 영하 40도는 너무 가혹했다. 남편도 펄쩍 뛰었다. 자기도 같이 못 가주는데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그러냐고, 제발 남들 다 가는 평범한 곳으로 가면 안 되겠냐고 (아참, 그 당시 남편은 막 이직을 한 상태라(= 수습 기간) 이번 여행은 정확히 말하면 남편 없이 가는 태교여행이었다).
위의 두 옵션이 모두 현실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나니 태교여행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러 상황과 조건들로 인해 내가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을 태교여행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멀리 갈 수 없다면, 차라리 오래 다녀오자. 그래서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이 제주다. 대신 열흘로.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유명한 카피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에어비엔비의 이 슬로건 정말 사랑한다) 이번 기회에 제주에서 현지인 모드로 살아보기로 한다. 연말부터 연초에 걸쳐 남은 휴가를 꽉꽉 붙여서 다녀오기로 했다. 다행히 우리 회사의 주요 시장인 일본도 연말에 긴 연휴가 있어서, 일이 많이 바쁠 것 같지 않다. 시간을 꽤 오래 두고 고민했지만, 의외로 결정은 간단하고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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