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블로그. 3월 마지막 날, 예정일은 일주일 가량 앞두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이를 만났다. 출산휴가에 들어간 지 딱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분만 후 2박 3일간 병원에서 지내다 퇴원하고 오늘은 조리원 3일차.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벌써 출산의 고통이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완전히 잊어버리기 전에 기억을 소환해 작성해보는 출산일기 (참고로 분만 진행 시각은 남편이 양가에 카톡으로 생중계한 시간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20.03.30
03:00 변의를 느끼며 일어났다. 임신 기간 중 새벽에 깨는건 비일비재해 익숙했으나 변의를 느끼며 일어나는 경우는 없었기에 조금 의아했다.
06:00 평소와 다름없이 유튜브를 보며 아침 요가를 하고 전날 미리 만들어둔 감자 계란 스프레드를 식빵에 발라 밥을 먹고 한번 더 잠을 청한다.
12:00 아침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생리통과 비슷한 싸한 느낌이 계속 이어진다. 컨디션이 평소와 다름을 느낀다.
14:00 점심을 먹고 통증을 잊기 위해 잠시 누워있는다는게 2시간 넘게 낮잠을 잤다 (이때 미리 자두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날 밤을 꼴딱 새워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20:45 업무를 마친 남편과 수다을 떨고 (“여름이를 볼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샤워를 하는데 발 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진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이슬? 남편을 급하게 호출했다. 이슬이 비친 후 보통 48~72시간 내 출산을 한다고 들었기에 심장이 쿵쾅쿵쾅 하기 시작한다.
21:15 샤워를 마치고 남편과 분주하게 출산 가방을 다시 점검했다. 이때부터 불규칙하게 생리통의 느낌이 찾아온다.
21:40 진통 어플로 진통 지속 시간과 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가진통으로 판명.
22:20 진통을 잊기 위해 남편과 침대에 누워 예능을 봤다. 보는 중간중간에 계속 진통이 이어진다. 진통 어플에 계속 기록한다.
20.03.31
00:00 진통 간격이 평균 10분 간격으로 짧아졌고 진통 어플에서는 산부인과에 갈 준비를 하라고 한다. 일단 산부인과에 전화해보기로 한다. 분만실의 간호사분이 진통 주기와 증상을 듣더니 초산모의 경우 주기가 4~5분이 2시간 동안 지속되면 찾아오라고 하셨다. 실제로 진행이 더디면 입원이 거절되기도 한다고 들었기에 집에서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00:10 조금이라도 잠을 청해보려고 했으니 계속 찾아오는 진통에 이내 단념한다. 남편을 먼저 재우고 거실에서 새벽 내내 진통의 파도를 느끼며 기록하기 시작한다. 진통이 지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쓴 출산 후기도 한 번씩 읽어본다.
04:45 새벽 2시 50분부터 진통 주기가 3~5분 사이로 이어진다. 진통 어플에서 당장 병원에 가라는 메시지가 뜬다. 남편도 마침 일어났다. 산부인과에 다시 전화해보니 못 견디겠으면 내원해도 될 것 같다고 한다.
05:20 미리 힘을 보충해야 할 듯싶어 마지막 만찬은 꾸역꾸역 계란 감자 샌드위치. 일부러 두 개나 먹었다.
06:20 진통을 조금 더 견뎌보다 이제는 가야 할 것 같다. 산부인과로 출발
06:40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가족분만실로 안내받았다. 간호사분이 내진을 하시더니 자궁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고 한다. 이렇게나 아픈데.. 절망적이었던 순간.
07:30 당직 의사 선생님이 다시 내진을 해주시고 입원이 결정되었다. 왼팔에 수액을 달고 오른팔에 항생제 테스트를 했다. 희망하는 분만 형태를 질문지로 주셔서 작성했다.
08:00 관장. 2분도 겨우 버텼다.
09:30 담당 의사 선생님께서 출근하셔서 방문하셨다. 분만 희망 사항에 무통주사는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겠다고 체크해 두었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무통주사는 아기한테 나쁜 것이 아니니 사용하는 것을 권장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진통 트라우마가 생겨 둘째를 못 낳을 수도 있다시며). 마침 진통의 세기가 견디기 힘든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기에 수락한다.
10:00 자궁문이 2cm 열린 상태에서 진통 주기가 6~10분 정도로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중간에 잠깐 잠이 든 것 같기도 하다). 분만이 지연되고 있다는 뜻이므로 간호사분이 서서 걸어볼 것을 권하신다. 걷고 있으니 이내 진통이 더 빨리, 그리고 더 세게 찾아옴을 느낀다. 극심한 통증에 남편을 붙잡고 서럽게 울었다.
11:06 3cm. 진통으로 몸이 계속 긴장되어 있는 상태라 간호사분이 계속 호흡 교정을 해주셨다 (“계속 이렇게 긴장하고 계시면 출산 후 온몸에 근육통 와요” 그리고 이 말은 현실이 된다).
11:54 4cm.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취과 선생님이 오셔서 드디어 무통주사 투여. 견디기 힘든 진통이 2~3번 지나간 후에 편안함이 찾아온다. 완벽히 통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기계에 찍힌 자궁 수축 지수가 30 이상으로 넘어가면 아픔이 느껴졌다) 견딜 수 있는 수준이었다. 나만 이렇게 편해도 될까. 여름이에게 미안했다.
12:43 6cm. 무통주사를 한번 더 투여했지만 첫 번째 주사만큼의 효과가 없었다.
13:01 견딜 수 없는 통증이 계속 이어졌다. 8cm. 의사 선생님이 내진하시던 중 따뜻한 물이 흐르는 느낌이 나며 양수가 터졌다는 말을 들었다.
13:30 10cm가 열려 분만 준비가 완료되었다. 담당 의사 선생님이 오시는 동안 조산사 선생님이 단호하게 분만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 윗몸일으키기 하듯이 침대 양 옆의 손잡이를 잡고 몸을 일으키며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불이 꺼진다 (르봐이예 분만의 조건 중 하나다).
13:40 열상 주사를 맞고 의사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힘을 준다. 힘이 달려 남편이 옆에서 일으켜 주었다.
13:55 머리가 빠져나오는 느낌이 들며 이내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린다. 2.93kg. 여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기록을 보면 자궁 문도 한 시간마다 1cm씩 잘 열렸고, 진통도 그 당시에는 괴로웠으나 분만까지의 진행 속도도 빠른 편이었던 것 같다. 의사 선생님도 초산 치고는 순산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무엇보다 나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 사실 이 외에 어떤 더 큰 축복을 바랄 수 있을까.
여름이라는 존재가 아니었으면 평생 느껴보지 못했을 벅찬 감정. 임신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작년 7월부터 지금까지 우리 부부에게 행복만 주고 있는 여름이에게 고맙다. 여름아, 세상에 나온 것을 환영해. 엄마, 아빠가 여름이의 엄마, 아빠가 되게 해 주어 고마워 :)
20.03.31
드디어 여름이를 만나다
@송파 포유문 산부인과
'에세이 > 엄마가 되는 과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리원 일기 (2) 모유가 나오지 않아서 (0) | 2020.04.14 |
---|---|
조리원 일기 (1) 우울감으로 점철된 나날들 (산후우울증, 몸살, 훗배앓이) (0) | 2020.04.08 |
임산부 막달검사 (단백뇨, 연쇄상구균 검출) (0) | 2020.03.20 |
임신과 감정 호르몬 (Feat.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0) | 2020.03.13 |
임신 36주, 출산가방을 챙기기 시작하다. (0) | 2020.03.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