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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엄마가 되는 과정

임신과 감정 호르몬 (Feat.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by Heather :) 2020. 3. 13.

   임신을 하면 감정 조절이 어렵다는 건 남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임신하면서 일어나는 모든 신체적 변화는 다 겪으면서도 정신적 변화는 내게 해당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시정지'될 나의 커리어와 그 자리를 대신할 '엄마'라는 새 역할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아침마다 일기에 한 줄 한 줄씩 적어 내려갈 때의 감정도 '우울'보다는 '받아들이는 과정'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럼에도 임신 기간 중 이건 호르몬 탓이다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무 이유 없이 무너진 적이 한두 번 있었는데 어제가 그랬다.  JTBC에서 방구석 1열 에피소드 85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vs. 어느 가족' 편을 보던 중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이미 봤던 영화였는데 보면서 코끝이 찡했던 장면을 어제 다시 봤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베갯잇을 눈물로 적셨다. 나의 슬픈 감정이 여름이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는지 조용히 있던 여름이도 움직이기 시작되었다. 마치 이미 다 큰 어른마냥 괜찮다며 내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는 것 같은 느낌의 태동이었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내가 오열했던 장면

 

   왜 같은 장면을 봐도 그때와 어제의 감상이 달랐을까. 호르몬의 영향일까. 아니면 이 영화의 스토리가 출산을 앞두고 보니 더 절절하게 와 닿았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일까. 오랜만에 저녁 약속으로 잠깐 나갔다 온 남편이 집에 돌아왔다. 남편에게 울먹거리며 영화 이야기를 해주며 나의 눈물을 쏙 빼놓은 장면을 보여주었다. 남편은 나름 진지하게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듯했으나 100% 공감하지는 못하는 모습이었다.

 

   잠들기 전 우연히 들어간 인스타그램에서 평소에 팔로우하고 있던 분이 아기 100일을 기념하며 올린 글을 읽었다. 아이를 낳고 한동안 이상한 슬픔이 있었는데, 아이가 자신 바로 앞에 버젓이 있음에도 열 달 동안 뱃속에서 한 몸같이 지내던 그 아이는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자신을 슬프게 했다고. 또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것이 나와 남편의 차이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24시간 아이와 함께 호흡하고 아이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나와 달리 남편은 내 배에 손을 대고 있을 때 가끔 느낄 뿐일 것이고, 이 때문에 아이보다는 내가 더 먼저, 그리고 자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말하다가도 금세 숨이 가빠진다든지, 누웠다가 일어날 때 다리에 받는 압력 때문에 괴로워한다든지 하는). 그래서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나 보다. 엄마의 모성애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아빠의 부성애는 학습되는 것이라고.

 

나의 여름이 (36주 1일차)

 

   호르몬이든, 내가 처한 상황의 변화에서 기인한 공감이든, '임신'이라는 특별한 경험으로 인해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감정의 폭 또한 한층 깊어졌음을 실감한다. 행복하고, 설레고, 경외롭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초조함. 그 외에도 부족한 나의 글솜씨로는 가히 표현하지 못할 다양한 복잡 미묘한 감정들. 그래도 일생에 한두 번 (두 번째가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찾아올까 말까 한 열 달이라는 생각을 하니 여름이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내 뱃속에서 꾸물거릴 남은 1분 1초가 더없이 아쉽게 느껴진다. 어젯밤처럼 감정적으로 지치고 힘든 순간이 앞으로도 더 찾아올지도 모르겠지만, 이 생경하고 강렬한 감정 또한 소중히 여기며 아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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