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포스트를 쓴 게 불과 3개월 전이라는 게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믿기지 않는다. 만년필이 자기 분열이라도 한 걸까? (그렇게 믿고 싶다.) 3개월 사이에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우선 현재 (2024년 1월 말) 기준 나의 만년필 보유 현황은 아래와 같다. 만년필 10자루에 최근에 구입한 딥펜 1자루까지 더해 총 11자루다. 분명 이전 포스트에서는 파이롯트 커스텀 742가 위시 리스트에 있는데 곧 들이게 될 것 같아서 불안하다는 글을 적었는데 그 모델도 당연히 샀거니와 그것 말고도 무려 7자루나 더 들이게 된 것이다.
우선 나의 구매 경위(라고 쓰고 '변명'이라고 읽는다)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원래는 위시 리스트에 있었던 파이롯트 커스텀 742만 사려고 했다. 그렇게 국내 펜샵을 기웃거렸지만 가격 때문에 고민하던 중 직구라는 신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 마침 요즘 엔저로 일제 만년필을 직구하기에 정말 유리한 상황이 아닌가. 그렇게 국내 펜샵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파이롯트 커스텀 742를 들일 수 있었다. 또 그즈음 파이롯트가 2024년부터 만년필 가격 인상을 단행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럼 지금이 가장 저렴하겠군- 하며 만년필 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다는 파이롯트 에라보 모델을 바로 추가로 구매했다.
파이롯트 커스텀 742와 에라보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금닙 만년필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기존에 쓰던 스틸닙 만년필들과는 다르게 부드럽게 종이 위를 미끄러지는 느낌이 신선하고 좋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파이롯트가 아닌 다른 브랜드의 금닙 만년필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찾아보니 세일러에는 무려 21K 금닙 모델이 있다네? (보통 금닙 만년필은 14K 혹은 18K이다.) 가격도 유럽제 만년필 14K 보다 저렴하잖아? 그렇게 나의 세 번째 일제 만년필 직구가 빠르게 성사되었다.
항상 처음이 어렵다. 그 후로 나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만년필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세일러 만년필을 직접 써보니 적당히 긁는 느낌이 좋아서 사각거리는 필감으로 유명한 오로라 88을 중고로 들였고 (새 제품을 사기에는 오로라 만년필 가격은 너무 사악하다), 오로라 88의 연필같은 사각임이 너무 좋아서 (아직까지도 오로라 88이 나의 최애 만년필이다) 닙은 같은데 조금 더 저렴한 모델인 오로라 탈렌튬을 추가로 구매했다. 몇십만 원 하는 만년필을 몇 자루 모아보니 원래 가지고 있던 트위스비가 굉장히 가성비 좋은 모델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트위스비 VAC 미니 (트위스비 에코보다 상위 모델이다) 와 트위스비 에코 화이트 로즈골드 (트위스비에서는 로즈골드 색상이 인기가 많아 같은 에코 모델이라도 로즈골드 디자인이 조금 더 비싸다)를 각각 추가로 들이게 되었다. 마지막 소비는 지난주에 배송된 카키모리 딥펜이다. 만년필과 함께 증식하는 잉크를 빠르게 테스트하고 소진하고자 딥펜에까지 손을 대게 된 것이다.
만년필 세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만년필이 증식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더 무서운 것은 만년필 가격에 대한 나의 생각의 변화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10만 원짜리 만년필도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50만 원짜리를 만년필을 보면 '괜찮아 보이는데 한번 사볼까?'라는 생각이 든다. 시중엔 100만 원, 200만 원 짜리 만년필도 많으니까. 따지고 보면 50만 원은 웬만큼 질 좋은 코트를 두 벌 살 수 있는 가격이고, 공기청정기나 청소기 같은 소형 가전을 살 수도 있는 가격인데 현실 세계에서의 50만원과 만년필 세계에서의 50만 원은 그 가치가 다르게 읽혀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점점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일까.
불행 중 다행인 건 이 만년필들을 관상용으로 두지 않고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일 일기를 쓰고, 다이어리를 쓰고, 독서노트를 쓰며 만년필을 쓰고 있다. 만 년은 거뜬히 쓸 수 있다고 해서 이름도 만년필(万年筆)인데 앞으로도 아끼지 말고 계속 잘 쓰다가 나중에 아이한테 물려줘야지. 이렇게 생각하니 왠지 아주 큰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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